[책] 휴일
정성일 지음 / 앨피 펴냄
2005년 8월, 한국영상자료원 보존고에서 한 편의 필름이 발견됐다. 영화사 목록에 없던 작품. 그러니까 감독의 필모그래피에도 각본가의 이력에도 등장하지 않은 영화였다. 9월 3일 영상자료원 시사실에서 상영회가 열렸고, 참석한 사람들도 어떤 영화가 상영되는지 정보를 알 수 없었다. 한국영화사의 걸작 반열에 오른 이만희 감독의 '휴일'이다.
당시 시사회에 참석했던 한 영화평론가는 2005년 이전까지 제목도 들어보지 못한 영화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낀듯하다. 그런 연유와 저간의 사연을 묶어 뒤늦은 연모를 보내게 되니, 한국영상자료원의 영화비평총서 시리즈 정성일의 '휴일'이다.
정성일. 착오 없기를 바란다. '더 글로리'에서 연진이 남편(일명 나이스한 개새끼)을 연기한 배우 정성일이 아니다. 90년대를 지나온 영화애호가라면 잊을 수 없는 이름 '정은임의 FM영화음악'의 시작부터 고정 패널이던 한국 시네필의 맏형 같은 인물, 영화평론가 정성일이다. 정영임과 정성일은 어쩌면 이음동의어였다. 심지어 정성일은 자신의 다른 책 첫 꼭지에서 '애도, 당신에게 보내는 편지'로 정은임을 소환한다. 여전한 영화광이면서 자타가 공인하는 한국 최고의 영화평론가가 쓴 비평집이라면 믿어도 좋다는 얘기. 얼마나 집요하고 세밀하게 영화를 나누고 분석했을지 추측할 수 있거니와 세상사에 두루 해박한 그의 지식의 바다와 만나는 순간 '대체, 이 사람 뭐지?' 기겁할지도 모르지만.
서문에서 저자는 "이 책은 영화비평이라기보다는 모험 안내서"로 읽히길 바란다고 적고 있다. '휴일'의 슬픈 운명을 증언하듯 혹은 새롭게 찾은 영화에 대해 주체못할 기쁨을 토로하듯 78분짜리 영화를 향해 곡진하게 써 내려간 연서. 그렇게 정성일은 신(scene)과 숏(shot)으로 나누고 분절하면서 시퀀스를 관통하는 시대의 공기를 촘촘하게 기술한다.
'새로운' 영화에 대한 이야기인 동시에 모든 영화가 '새로웠던' 이만희 감독이 활보한 1968년 서울의 겨울을 소환하는 것. 이 책은 영화비평서인 동시에 당대 서울의 분위기를 엿볼 수 있는 사회탐구서로 기능한다. 예컨대 빈곤 없는 모더니즘이 없듯이 자본주의가 없는 모더니즘도 없다는 주장을 내세워 주인공 허욱을 '빈곤의 산책자'로 규정하기. 이를테면 19세기 파리를 활보하던 풍경의 만보객이 아니라는 얘기다. 허욱은 서울의 풍경을 구경할 만큼 낭만적인 부르주아가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
'휴일'은 3장으로 나누어 영화의 배경인 '1968년, 그해의 맥락(들)'을 먼저 짚으면서 시작하는데 정성일 특유의 만연체와 유장한 역사 지식이 실타래처럼 펼쳐진다. 그러니까 한국영화에서 이만희 감독이 차지하는 위치 혹은 지위와 당대 한국 사회, 특히 68년 겨울 한국영화계 안과 바깥을 속속들이 헤집을 때면 필력에 기함할 정도. 뒤이어 낮과 밤으로 구분해 허욱의 행보를 추적하는 '휴일'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된다.

너무나 가난해서 커피 한 잔 값도 없는 연인이 1968년 어느 일요일 남산에서 길을 잃고 서울을 떠돌면서 각자의 시간을 분투하는 이야기가 노련한 평론가의 눈과 가슴을 거쳐 텍스트로 펼쳐질 때, 평소 정성일이 자주 쓰던 표현을 빌리면 "어찌 이 영화와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추신) 저자도 권고하듯이, 책을 읽기 전에 영화 '휴일'을 먼저 볼 일이다.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