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아시아 100인 명단에 새롭게 이름을 올린 한국인이 하나 있었다. 기성 세대는 잘 모르는 친구였다. 전세계 모든 프로게이머의 롤 모델이자 우상인 '페이커'였다. PC 게임 '리그 오브 레전드'는 몰라도 프로게이머 페이커는 모르는 젊은이 세상에 없을 정도로 그의 영향력은 어마어마하다. 2023년 가을 중국에서 열린 아시안게임 선수촌엔 무려 1천명이 넘는 타 종목 선수가 페이커와 사진을 찍으려 몰려들 정도였다.
외국 대입 에세이를 준비하며 학생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부모님과 갈등을 겪는 일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그 정도가 입시 과정을 저해할 정도로 심하다고 느껴질 때 나는 학부모와 진지하게 면담을 진행한다. 특히 자녀가 예체능 분야인데 부모가 이 분야에 문외한일수록 갈등이 깊어질 때가 많다. 물론 학부모는 상당히 억울하다. 다른 학부모와 달리 공부만 하라고 부추기지도 않았고 경제적 지원을 충분히 해줬는데 어쩌란 말인가 하는 반응이 대다수다.
그럴 때 난 "페이커 할머니의 지혜를 배우라"고 말씀드린다. 리그 오브 레전드 팬이라면 모두가 다 아는 페이커의 할머니는 손주가 방에서 게임하는 것을 허락하는 정도에서 그치지 않고 게임의 캐릭터, 캐릭터의 스킬, 아이템까지 줄줄이 꿰고 계셨다. 내가 학부모 상담 때 관심이 최고의 서포트라고 말하는 이유다. 페이커가 학교를 자퇴하고 프로게이머의 길에 접어들기 전까지 성적도 상위권이었다고 한다. 페이커 할머니와 아버지는 페이커 선택을 그저 본인에게 맡겼고 그 결과 e스포츠계 전무후무한 슈퍼스타가 탄생했다.
이런 예시를 들 때마다 "그건 아주 소수에 국한된 경우"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자녀가 학문적으로 잘 안 풀렸다고 해서 자녀에게 큰 관심을 쏟은 게 후회할 일일까. 대학 진학의 가장 큰 목적이 취업이 아니라 넓은 시야와 비판적 사고를 갖는 것에 있다. 더 많은 걸 보는 사람, 소위 인사이트가 좋은 사람은 추후 어떤 직업을 갖게 되더라도 잘 풀릴 게 확실하기 때문이다. 젠틀몬스터의 모기업 아이아이컴바인드의 창업자인 김한국 대표는 신문방송학과 출신이고 김미경 아트스피치앤커뮤니케이션 대표는 작곡과 출신이다. 그들의 부모는 자녀가 정해진 길 따라 가지 않았다고 속상해 할까.
인사이트, 인내심 그리고 좋은 성품을 가진다면 본인 꿈을 마음껏 펼칠 수 있다. 고등학교 때 진정 원하는 걸 찾지 못했다면 그저 점수가 잘 나오는 과목을 바탕으로 국외입시 전략을 잘 세워 인문학으로 유명한 대학교를 선택하는 게 가장 현명하다. 여러 학문을 통해 비판적 사고력을 끌어올리고 대학 커뮤니티에서 사회 생활을 길러 나가는 게 대학 진학의 궁극적 목표가 되도록 말이다. 입시생의 성적보다 에세이와 특별활동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학교일수록 해당 교육 프로그램이 잘 돼있을 가능성이 높다.
아이들의 국외 입시를 돕는 일은 생각 보다 재밌는 일이다.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입시 체계 덕에 한 아이의 성장 과정과 생각을 고스란히 알게 돼서다. 그 서류가 스스로에 대한 믿음으로 점철된다면 합격률은 최소 30%쯤 상승한다. 전 분야 스펙이 한가득인 무색무취 육각형보다 가능성이 가득한 백지 상태로 보여지는 게 더 나은 전략일 수 있다. 자녀를 아이비리그에 보내고 싶은가. 자녀를 세심히 관찰하고 그들의 관심사를 공감하며 당신도 공부하시라. 간섭 없이 한 발짝 물러나서 조용히 말이다. 그게 수억원의 사교육비보다 훨씬 생산적일 수 있다.
김나연 HMA유학원 대표

* 가스인라이팅(Gas Enlighting)은 매일신문에서 새롭게 선보이는 칼럼 공간입니다. '가스라이팅'은 1930년대 가스등을 사용하던 시절 파생된 용어입니다. 가스등을 조금씩 어둡게 해 누군가를 통제하는 걸 의미하는데요 '가스인라이팅'은 그 반대로 등불을 더 밝게 비춰주자는 뜻입니다. 젊은이들의 시각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자주 선보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