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식 제이에스 소아청소년과 원장, 계명의대 명예교수
진료실 창밖 포플라 나무가 어느새 여름의 짙은 초록을 잃고, 빛바랜 옷을 갈아입듯 황금빛으로 물들어 간다. 바람이 불면 잎사귀가 작은 손바닥처럼 흔들리다, 어느 순간 바닥으로 내려앉는다. 계절의 변화는 매일 똑같은 진료실 풍경 속에서도 내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그래서일까, 나는 진료복의 색깔을 분홍·초록·파랑으로 바꾸어 입곤 한다. 진료실에서 신는 운동화도 여러 색깔을 번갈아 신는다. 아이들과 부모가 "오늘은 무슨 색이네요"라며 미소 지을 때, 그 짧은 대화가 하루를 환하게 해준다.
대학병원에 있을 때는 달랐다. 흰 가운과 와이셔츠, 넥타이가 규칙 같은 것이었다. 여름이면 조금 시원하라고 아내가 모시가 섞인 와이셔츠를 챙겨주었는데, 까슬까슬한 촉감 때문에 입기를 꺼렸다. 나는 특별히 먹는 것이나 옷차림에 예민한 편은 아니지만, 촉각만큼은 민감했다. 어릴 적, 나일론 스웨터를 강제로 입어야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거칠고 따가운 감각은 시간이 흘러도 몸에 남는다.
이런 경험 때문일까. 발달이 늦어 병원을 찾는 아이들 중 유난히 감각에 예민한 아이들을 보면 남 일 같지 않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이름을 부르며 손을 잡아주면 좋아하지만, 어떤 아이는 누군가 다가오면 잽싸게 몸을 피한다. 손길이 닿자마자 소스라치게 놀라며 등을 돌리기도 한다.
새로운 음식을 삼키지 못해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아이, 옷 태그 하나에 괴로워하며 벗어던지는 아이도 있다. 드라이어 바람 소리에 귀를 막고 울부짖는 아이, 청소기 소리가 나면 방 안 구석으로 달아나는 아이도 있다. 반대로 TV 불빛만 바라보며 손을 흔드는 아이도 있고, 주변 세계에 거의 반응하지 않는 아이도 있다.
감각은 오감에 그치지 않는다. 균형을 잡아주는 전정감각, 몸의 위치를 알려주는 고유수용감각까지 일곱 가지 감각으로 나눈다. 감각이 지나치게 예민하면 그쪽으로 에너지가 쏠려 발달이 늦어지고, 둔감하면 자극을 받지 못해 성장의 시기를 놓친다. 두세 살 아이가 산만해 부모가 ADHD를 걱정하며 찾아올 때, 단순히 수면이 부족하거나 감각이 예민해서 산만해지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환경을 조정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진료실에서도 나는 소리를 줄이고, 조명을 부드럽게 조절한다. 가정에서는 예측 가능한 일상을 만들어 주는 것이 아이에게 큰 도움이 된다. 그네 타기, 트램펄린, 균형잡기 놀이, 모래놀이 같은 감각조절 활동은 아이를 차분하게 해준다. 하루의 리듬도 중요하다. 짧은 활동과 짧은 휴식을 반복하며 규칙적인 수면을 지켜주는 것이 아이의 신경계를 안정시킨다. 더 전문적인 도움이 필요하면 감각통합치료가 큰 힘이 된다.
사실 감각의 문제는 아이들만의 것이 아니다. 성인도 예민한 감각을 안고 살아간다. 우리는 자극을 찾아 끊임없이 달려가기도 한다. 유발 하라리는 『호모 데우스』에서 인간의 뇌가 도파민 보상 시스템으로 작동하며, 쾌락을 좇다가 점점 더 강한 자극을 원하게 된다고 말한다. 그 모습은 중독과 닮아 있다. 하지만 인간의 삶은 단순한 쾌락이 아니다. 의미와 관계, 책임 속에서 삶은 비로소 단단해진다.
요즘 세대를 설명하는 말 가운데 '욜로(YOLO:You Only Live Once)족'이 있다. "인생은 한 번뿐"이라는 구호 아래 현재의 즐거움과 만족을 최우선으로 삼는 태도다. 불확실한 미래, 치솟는 집값, 어려운 취업 현실 속에서 작은 사치를 즐기며 오늘만을 사는 것이다. 하지만 고대 시인 호라티우스가 남긴 '카르페 디엠(Carfe diem)'은 조금 다르다. 충동적 쾌락이 아니라, 오늘 하루를 소중히 여기며 의미 있는 현재를 붙잡으라는 말이다.
아이들이 감각의 균형을 이루며 건강하게 자라는 것이 중요하듯, 부모에게도 균형이 필요하다. 아이를 다른 아이와 비교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신뢰하며 오늘에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부모의 카르페 디엠이다. 오늘 아이가 내민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는 것, 함께 길을 걸으며 햇살을 느끼는 것, 그 작은 순간이 쌓여 우리 삶을 빛나게 한다.
낙엽이 지는 계절, 하루의 무게를 소중히 붙잡는 일. 그것이 아이와 부모, 그리고 우리 모두가 살아가는 길 위에서 잊지 말아야 할 카르페 디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