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식 전 고용노동부장관
노동조합법 제2조와 제3조 개정안, 이른바 '노란봉투법'을 둘러싼 논란이 뜨겁다. 노동계는 하청노동자의 권익 보호를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라 주장하고, 경영계는 법적 불확실성과 투자 위축을 우려한다. 하지만 극단적 대립 만으로는 문제 해결은커녕 갈등의 악순환만을 키울 뿐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한국 노동시장의 구조적 모순을 직시하고, 새로운 상생의 해법을 찾는 일이다.
한국 노동시장의 가장 큰 문제는 이중구조다. 그중 광범위한 원하청 구조하의 원청과 하청간 격차다. 같은 공장에서 유사한 일을 해도 원청 정규직과 하청 노동자의 임금은 두 배 가까이 차이가 난다. 20년 이상 숙련을 쌓은 노동자조차 시간당 만 원 남짓에 머무는 현실은 구조적 불평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더욱 심각한 것은 상시지속 업무까지 외주화되면서 '위험의 외주화'가 일상화된 점이다. 산업재해 상당수가 하청에서 발생하는 이유다. 현행 제도하에서는 불법파견·위장도급이 만연해도 실질적 제재가 어렵다. 기업별 교섭 구조와 대기업 노사간 갈등적 담합구조는 원청-하청 간 이중구조를 고착시켰다.
상반되는 노사의 주장을 떠나 법개정의 긍정적인 측면을 본다면, 하청 노동자의 교섭력이 강화되고 임금 격차 완화와 근로조건 개선 가능성이다. 원청 역시 공정한 거래 관행을 정착시킬 가능성이 크다. 반면, 교섭 구조가 복잡해져 법적 분쟁이 늘고 노사관계의 사법화가 심화될 수도 있다.기업이 불확실성 등으로 투자를 위축시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피해는 고용축소와 노동의 입지약화로 귀결된다. 결국 법 자체보다 그 시행 방식과 보완책 마련 여부가 성패를 가를 것이다.
보완 과제는 다음과 같다. 첫째, 현장 검증과 가이드라인이 필요하다. 주요 업종별 시범사업을 통해 예상치 못한 부작용을 점검하고, 교섭 절차와 역할 분담을 명확히 규정해야 한다. 현행 노조법령에 규정된 대로 초기업 단위 교섭 등 변화된 상황에 적합한 다양한 교섭이 활성화되도록 지원해야 한다.
둘째, 분쟁 조정 시스템 강화다. 노동위원회의 전문 인력을 확충하고 신속한 조정 절차를 마련하자. ADR을 지원, 잠자고 있는 사적조정을 활성화해야 한다. 노사갈등의 사법화 경향 강화와 맞물려 더욱 의미가 클 것이다.
셋째, 중소기업 지원책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임금 인상 부담을 감당하기 어려운 중소 원청기업에 대해서는 정부 차원의 재정·제도적 지원도 필요하다. 넷째, 노사정 대화 채널의 상시화다. 갈등을 신속히 조정하고 현장의 문제를 제도적으로 개선하기 위해서는 정기적이고 실질적인 대화가 필수다. 대립갈등적 단체교섭방식보다는 사회적 공감대 형성을 통한 생산적,문제해결적 사회적 대화가 필요하다.
노란봉투법 만으로 구조적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 법제·의식·관행은 서로 맞물려 작동하고, 법제도 노동법 내에서 법령간, 노동법과 기타 법령간의 상충문제도 해결하여 법제간 정합성을 확보해야 한다. 그 방향은 경제주체간 협력행동을 증진시키는 것이어야 한다. 대기업과 중소기업간 공정거래 문화 정착, 산업 생태계의 건전성 제고 등이 포함될 수 있다.
나아가 기후위기, 디지털 전환, 인구구조 변화, 국제통상질서 재편 등 거대한 변화의 물결 속에서 '공정한 전환'을 추진해야 한다.노동법 개정을 포함한 나라 안팎의 환경변화에 따른 일자리 충격에 노사가 공동 대응할 수 있는 시스템 구축도 시급하다. 정치권은 사회적 공론화와 여야 및 노사간 합의를 더이상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
절차적 정당성이 결여된 법은 수용성과 실효성을 잃는다. 그러나 책임을 정치권에만 돌릴 수는 없다. 일부 대기업의 노사간 갈등적 담합과 노조의 전투적 노선 및 관성적 노사관행, 경영계의 단기 비용 중심 사고, 정부의 땜질식 처방이 맞물려 모두가 피해자가 되는 '죄수의 딜레마'가 반복되어 왔기 때문이다.
이제는 각 주체가 자기 역할을 성찰해야 한다. 노동계는 전체 노동자의 권익을 대표할 책임감을, 경영계는 노동을 비용이 아닌 자산으로 보는 성숙함을, 정부는 갈등 조정 능력을 강화해야 한다. 정치권은 신념의 정치가 아니라 책임정치로 나서야 한다. 개별 경제주체 선택의 각자 합리성이 '죄수의 딜레마'에 빠지지 않고 공동체의 합리성을 달성하도록 여건을 조성하고, 갈등을 적극 조정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