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정우의 읽거나 읽히거나] 복지국가의 차갑고 잔인한 현실

입력 2025-08-07 10:13:47

[책] 로재나
마이 셰발·페르 발뢰 지음 / 엘릭시스 펴냄

[책] 로재나
[책] 로재나

1964년 7월 8일 오후 3시가 막 지났을 무렵, 보렌스홀트 갑문에서 한 구의 시신이 발견된다. 액세서리를 걸치지 않은 검은 머리카락을 지닌 알몸의 20대 여자. 어디서 온 누구이고, 왜 주검으로 발견되었으며, 범죄 피해자라면 범인은 누구인가?

마르틴 베크 시리즈를 통해 북유럽 범죄소설의 선구자로 자리매김한 마이 셰발과 페르 발뢰. 그들의 시작을 알리는 소설 '로재나'는 복지국가 스웨덴에서 발생한 범죄를 느슨하고 현실적으로 묘사하는 사회고발성 강한 작품이다.

'로재나'에는 없는 게 많다. 범죄소설인데도 추격전이나 완강한 저항과 격투가 없고, 당연히 총격전은 상상하기도 힘들다. 용의자와 참고인의 정당한 항의와 진술의 자유가 보장되는 경찰서 풍경이 악다구니와 거친 몸싸움을 대신할 따름이다. 때문인지 주인공인 국가범죄수사국 살인수사과 8년 차 형사 마르틴 베크에게 "총은 대부분의 상황에서 별 쓸모가 없었다."(37쪽) 또 우리가 상상하는 형사가 없다. 이를테면 근로자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경찰의 근무 행태, 심지어 2년 뒤가 배경인 '웃는 경관'에서 수사관들은 "현재는 특별한 사건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비교적 떳떳하게 놀아도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만큼 공권력이라기보다는 9to5를 준수하는 직장인에 가까워 보인다. 꼼꼼한 증거수집과 혐의입증에 주력하면서도 용의자 인권을 지키려는 사람들. 그것은 마르틴 베크가 '나는 끈질기고, 논리적이고, 완벽하게 냉정하다.'며 다짐하는 경찰의 중요한 덕목과도 일치한다.

소설 속 배경과 70년대 한국 사회를 비교하는 건 무의미한 일일 터. 그러니까 1960년대 스웨덴의 수사방식(용의자 색출 추적 체포와 심문 등)이 당대 사회 시스템을 지배하는 시민 정서와 무관치 않다면, 90년대까지도 인권유린과 고문과 강압 수사가 일상화된 한국의 공권력을 떠올릴 때 놀라운 광경이라는 얘기다.

1960년대 서구사회는 법에 대한 근본적 신뢰가 흔들리고 훼손되기 시작했다. 미스터리를 해결하는 일련의 과정이 공동체에 유의미하거나 진실을 보장한다고 말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범인 검거 즉 '후더닛(who done it?)'에 몰두한 경찰 수뇌부와 달리, 마르틴 베크가 '와이더닛(why done it?)'에 초점을 맞춘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나른하고 무료한 일상이 만든 복지국가의 그림자. 냉전 시대 미스터리의 대표주자인 007시리즈의 제임스 본드가 아리따운 여성을 유혹하고 멋진 자동차와 신무기로 적과 맞서 싸울 때, 어둡고 추운 스톡홀름의 형사 마르틴 베크는 경찰 수칙을 준수하며 조용히 기다리다가 우직하게 범죄의 핵심을 파고든다. 이것이 '마르틴 베크 시리즈'의 미덕이다.

"홀연 사라져도 아무도 그를 그리워하지 않을 정도로 철저하게 혼자인 사람은 없다."(50쪽) "역겹다, 끔찍하다, 야만적이다, 이런 단어들은 신문기사에나 쓰일 뿐 내 머릿속에는 없다. 살인범도 인간이다. 남들보다 좀더 불운하고 좀더 부적응적인 인간일 뿐이다."(88쪽)

영화평론가 백정우
영화평론가 백정우

범죄와 범인의 구조적 문제를 규명하려는 마르틴 베크의 독백. 누가 봐도 살인사건을 맡은 형사가 아닌 범죄 심리학자나 정신분석학자의 말처럼 들리지만 실은, 마이 셰발과 페르 발뢰가 스웨덴의 차갑고 잔인한 사회 현실 앞에 던지는 경고장은 아니었을까?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