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스마트폰 내려놓고 붓을 들었다…서예(書藝)가 준 '몰입의 기쁨'

입력 2025-08-08 06:30:00

서예 일일 체험…붓 끝에 온 신경 집중
"온전히 스스로에게 몰입하는 시간"
"잡녑 사라져" 서예에 빠진 MZ들
경북대 서예동아리 '경묵회' 회원 100명 훌쩍

경북대학교 서예동아리
경북대학교 서예동아리 '경묵회' 회원들이 동아리방에 모여 붓글씨 연습을 하고 있다. 이연정 기자

주말앤 팀은
주말앤 팀은 '집중력 끌어올리기' 두 번째 시리즈로 서예 체험을 했다. 이연정 기자

(전지적 이연정 기자 시점으로 쓴 기사임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최근 몇 년 새 스스로가 눈치 챌 만큼 집중력이 크게 떨어진 사람이다. 하나의 책을 집중해서 읽기 힘든 탓에 여러 책을 번갈아가며 읽는 '병렬독서'는 기본이고, 빨래할 옷을 정리하다 말고 방이 더럽다며 갑자기 청소기를 돌리는, 거의 성인 ADHD(주의력결핍 과다행동장애) 입문 단계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런 나에게 주말앤 팀의 '집중력 끌어올리기' 체험 시리즈는 과연 얼마나 도움이 될 것인가..! 지난 '다도' 편에 이어 이번 편은 정적인 취미의 끝판왕으로 불리는 '서예'다. 초등학생 때 다닌, 동네 천방지축들 다 가둬놨던(?) 서예학원을 다시 가게 될 줄이야. '제발 잃어버린 저의 집중력을 찾아주소서…' 주말앤 팀은 간절한 마음으로 지난달 31일, 이종호 한국서예협회 대구지회 회장이 운영하는 수성구 지산동 단허서예원의 문을 두드렸다.

◆다른 생각한 찰나, 선이 흐트러졌다

"펜과 같은 경필(硬筆)과 달리, 서예에 쓰는 붓은 수많은 터럭(털)이 모여 만들어진 도구예요. 터럭들과 그 사이의 먹물을 느끼고 조절하는 미세한 감각을 익히기 위해선 극도의 몰입과 오랜 시간의 숙련이 필요합니다."

본격적으로 서예를 배우기 전, 이 회장의 가르침을 들으니 '소년 천재는 있어도 소년 명필(名筆)은 없다'는 말이 와닿았다. 재능은 타고날 수 있어도 재능 만으로 대가가 될 수는 없다는, 그만큼 세월과 몰입이 필요한 예술(藝術)이라는 얘기다.

그래, 고작 두세시간의 일일 체험으로는 서예라는 깊고 넓은 물에 고작 손가락 하나 담근 정도겠지. 머쓱함을 뒤로 한 채 책상에 앉았다.

붓을 들기 전, 차분히 먹을 갈며 마음을 가라 앉힌다. 최현정 기자
붓을 들기 전, 차분히 먹을 갈며 마음을 가라 앉힌다. 최현정 기자
이종호 한국서예협회 대구지회 회장이 선 긋기 시범을 보이고 있다. 최현정 기자
이종호 한국서예협회 대구지회 회장이 선 긋기 시범을 보이고 있다. 최현정 기자

예상과 달리 붓이 아닌 먹을 쥐는 것에서부터 시작했다. 판매용 먹물을 쓴다면 편하겠지만, 직접 먹을 갈면서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오늘 써야 할 글귀를 생각하는 시간을 갖는 것.

이 회장은 "요즘 학교에서 국·영·수 위주의 수업만 이뤄지고 예체능을 중시하지 않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크다"며 "서예는 인내와 몰입을 경험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성현(聖賢)들이 남긴 귀감이 되는 글귀, 사자성어 등을 쓰며 인성을 기를 수 있다는 큰 장점이 있다"고 말했다.

이날 수업은 가로, 세로로 선을 긋는 연습을 한 뒤 판본체로 각자의 이름을 적어보는 순서로 진행됐다. (이렇게 한 문장으로 적으니 간단해 보이지만 과정은 결코 간단하지 않았다.)

우선 붓을 아무렇게나 잡아서는 안된다. 엄지와 검지, 중지를 둥글게 말아 그 안으로 붓을 가볍게 잡은 뒤 약지로 붓대를 받친다. 팔꿈치를 들어 팔이 종이와 평행을 이룬 상태여야 한다. 꼬았던 다리와 허리가 저절로 펴지고 몸에 약간의 긴장이 더해졌다. 아니, 자세 교정 효과까지?

처음 글자를 익히는 아이마냥 한 글자, 한 글자 내 이름을 정성 들여 썼다. 이연정 기자
"선생님 제 마음이 비뚤어졌나봐요." 붓이 그려내는 선은 곧 내 마음이었다. 잠깐 다른 생각을 해도 삐끗. 한 선을 긋는데 온 신경을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최현정 기자
마음이 급하면 붓이 꼬여버린다. 붓의 결을 잘 보며 조절해야 바른 글씨를 쓸 수 있다. 이연정 기자
처음 글자를 익히는 아이마냥 한 글자, 한 글자 내 이름을 정성 들여 썼다. 이연정 기자
경북대학교 서예동아리
마음이 급하면 붓이 꼬여버린다. 붓의 결을 잘 보며 조절해야 바른 글씨를 쓸 수 있다. 이연정 기자

마침내 붓 끝이 종이에 닿았다. 핵심은 역입(逆入). 획을 시작할 때 진행 방향과 반대의 방향으로 거슬러 들어가는 것이다. 또 중간마다 먹의 농도를 조절하기 위해 붓을 살짝 들어줘야하는데, 이 때 획의 굵기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손의 감각에 온 정신을 집중하고 한 획을 긋는 동안 정말 주변의 공기가 멈춘 듯한 신기한 느낌이 들었다.

이 기나긴 연습은 얼마나 해야 하는 걸까? 정말 잠깐, 다른 생각을 한 찰나에 선이 흐트러졌다. 하지만 한 번 그어진 선을 지울 수는 없는 일. 더욱 심기일전으로 붓 끝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그렇게 연습한 획을 바탕으로 이름을 쓰는 것까지 해보고나니 훌쩍 시간이 지나있었다. 휴대전화를 이렇게 오래 안 본 적이 언제인지. 오롯이 나의 움직임에만 몰입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이 회장은 "수많은 기술이 집약된 반도체칩처럼, 서예인들의 획 하나에는 평생의 고민과 노력이 깃들어있다"며 "볼거리, 즐길거리가 넘쳐나는 세상 속에 고요히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정제할 수 있는 예술이 바로 서예"라고 말했다.

경북대학교 서예동아리
경북대학교 서예동아리 '경묵회' 회원들이 동아리방에 모여 붓글씨 연습을 하고 있다. 이연정 기자

◆"스마트폰 내려놓게 돼요" 서예에 빠진 MZ

"100명이 넘는다고요?"

눈이 동그래졌다. 대학의 서예과가 폐과되고, 전국 서예 관련 협회들이 회원 모집에 어려움을 겪는 시대에, 경북대학교 서예동아리 '경묵회'의 올 1학기 기준 회원 수는 110명에 달한다. 학부생부터 대학원생, 유학생까지 MZ세대들이 먹향에 흠뻑 빠져 나란히 앉아 붓글씨를 쓰는 모습이라니, 귀하다 귀해.

경묵회는 1974년 설립돼 지난해 창립 50주년을 맞았다. 회원들은 학기 중 일주일에 두세 번 가량 정기적으로 모여 자신의 기량에 맞게 연습을 한다. 학기당 회비 3만원을 내면 모든 재료들이 갖춰진 동아리방에서 자유롭게 연습할 수 있다고.

지난해 2학기 경묵회에 가입한 정유나(22·간호학과) 씨는 "평소 접하기 힘들었던 색다른 활동을 해보고싶어 가입했다"며 "친구들에게 서예동아리에 가입했다고 하니 놀라는 한편, 의외로 많이 호기심을 갖고 도전해보고 싶어했다"고 말했다.

이어 "써볼수록 실력이 느는 게 느껴져서 더 재밌다. 마음이 차분해지고, 잡념이 사라지는 시간을 경험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최나윤(21·신소재공학과) 씨는 "요즘 수업 시간에 패드 등 디지털로 대충 필기하는 경우가 많은데, 천천히 글씨를 쓸 수 있어 좋다. 서예를 하다보니 손글씨도 많이 예뻐졌다"며 웃었다.

경북대학교 서예동아리
경북대학교 서예동아리 '경묵회' 동아리방의 모습. 이연정 기자
경북대학교 서예동아리 '경묵회' 회원들이 동아리방에 모여 붓글씨 연습을 하고 있다. 이연정 기자

회원들이 모여서 선비처럼 글씨만 쓰는 건 아니다. 동아리 내 소모임이나 자체 서예대회, MT 등 서로 교류하며 친목을 다지고 소속감을 높일 수 있는 다양한 활동도 이어가고 있다. 오는 9월에는 전시회도 열 계획이라고.

엄해인(21·중어중문학과) 씨는 "종이와 붓만 갖고 나만의 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점도 큰 매력으로 다가왔다"며 "원래 한 가지 일에 집중을 잘 못했었는데, 여기에서는 몇 글자만 써도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고요하게 먹을 갈 때부터 몰입의 기쁨이 기대될 정도"라고 말했다.

회원들은 "날 때부터 디지털이 익숙한 세대지만, 아날로그가 주는 독특한 매력에 매료돼 활동을 지속하게 되는 것 같다"고 입을 모았다.

경묵회 회장을 맡고 있는 김유나(22·수학과) 씨도 또래들에게 서예를 '강추'한다고 전했다.

"획 하나를 쓰는 게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아 답답할 때가 있어요. 그래도 심호흡하고 계속 쓰다보면 저절로 인내심이 길러지죠. 처음에는 한 번에 잘 쓰려고 했다면 이제는 못써도 다시 쓰면 되니, 쓰는 것에 의의를 두자고 마음을 내려놓았어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게 된 것도 서예 덕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