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창-이정식] 반짝 관심으론 중대재해 못 막는다

입력 2025-08-14 11:32:31

이정식 전 고용노동부장관

이정식 전 고용노동부장관
이정식 전 고용노동부장관

정부가 연일 중대재해 근절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표명하고 있지만, 우리 사회가 그 의지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해결해야 할 근본적인 과제들이 많다.중대재해는 단순히 처벌 강화 만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이는 제도를 비롯한 의식과 관행, 노사 관계, HR, 소유·지배구조 등 다양한 요소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구조적이고 역사적인 문제다. 따라서 사후 처벌과 강제보다는 사전 예방과 자율규제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접근해야 한다. 그 시작은 안전을 모든 의사결정과 선택의 최우선 가치로 여기는 문화와 의식을 내면화하는 것이다.

​먼저, 안전불감증과 내로남불의 이중 잣대부터 버려야 한다. 우리가 중대재해의 원인과 해결책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진짜 문제는 안전을 최우선 가치로 삼아야 한다는 인식이 사고 발생 시에만 반짝하고, 평상시에는 원칙과 실천이 따로 노는 이중적 의식 구조에 있다.

"안전수칙을 어긴 사람은 징계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자신이나 가까운 사람이 규칙을 위반했을 때는 "봐주지 않는 경영진"을 원망하는 이중적인 태도가 우리 사회에 만연하다. 안전행동을 위한 CCTV 설치를 둘러싼 악용과 노사갈등, 상급노조나 외부전문가의 예방적 안전진단과 사업장 역학조사 비협조, 작업중지 조기해제를 둘러싼 노사담합 등이 대표적 사례다.

이러한 이중 잣대는 작은 위반을 방치하고, 유해·위험요소 제거를 방해함으로써 결국 대형 사고로 이어지는 하인리히 법칙을 무시하는 행위다. "호미로 막을 일, 가래로 막는다"는 속담처럼, 사소한 안전수칙 위반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문화가 결국 대규모 인명 피해를 초래한다. 사고가 발생하면 모든 것을 잃는다는 절박한 인식을 가지고, '목구멍이 포도청'이 아니라 '안전이 포도청'이라는 가치관을 가져야 한다.

또 중대재해가 발생한 기계와 장소를 흰 천으로 덮어놓고 작업을 지시하는 기업주나, 작업 중지로 인한 임금감소를 우려해 조기 작업중지 해제를 요청하는 노조간부의 사례들이 웃지 못할 우리 현실이다. 나아가 처벌회피에 급급한 보여주기식 안전 활동과 형식적인 서류 작업으로는 근본적인 구조 개선을 이룰 수 없다.

​안전은 노사정 모든 경제 주체가 각자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서로 협력할 때 비로소 완성된다. 특히 예방 중심의 안전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중요하다. 안전 선진국에서 효과가 입증된 위험성 평가를 중심으로 노사 간 참여와 협력을 이끌어내는 상생의 산업·노동 생태계를 조성해야 한다. 이를 위한 제도적 개선 방안으로는 다음 세 가지를 고려할 수 있다.

첫째, 형사처벌 일변도에서 경제적 제재 중심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 무거운 형사 처벌이 오히려 솜방망이 처벌로 이어지거나 처벌 자체를 어렵게 만드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경제적 제재를 중심으로 제재 체계를 전환하는 것을 검토하고, 대법원 양형위원회의 양형 기준 마련을 통해 실효성을 확보해야 한다.

둘째, 근로자의 경영 참여 확대 보장과 내실화가 필요하다. 근로자 참여 및 협력 증진 제도를 강화하고, 노동이사제나 공동결정제도 등 근로자의 경영 참여를 확대해야 한다. 이는 안전에 대한 책임감을 높이고 현장의 목소리를 반영하는 데 도움이 된다. 노사간 직접적 실력행사에 의한 대립 갈등의 분배위주의 노사관계보다 생산현장에서의 일상적 협력이 가능한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셋째, 신기술 위험에 대해 선제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리튬 배터리, 인공지능(AI), 로봇 등 새로운 기술이 가져오는 위험에 대한 안전 기준과 대응 매뉴얼을 서둘러 마련해야 한다. 최근 리튬 배터리 화재 사고 이후에도 신기술 위험에 대한 대비가 여전히 부족하다는 점이 드러난 만큼, 변화하는 환경에 맞는 새로운 안전 시스템이 절실하다.

​안전한 사회를 만드는 데 '공짜 점심'은 없다. 선진국 수준의 안전을 원한다면 그에 상응하는 노력을 감수해야 한다. 정부의 강력한 의지와 제도 개선도 물론 중요하지만, 중대재해 근절의 출발점은 결국 우리 모두의 의식 개혁이다.

안전을 최우선 가치로 여기고, 이를 위해 원칙과 안전수칙을 지키며, 불편함을 기꺼이 감수하는 문화가 자리 잡을 때 비로소 안전한 사회가 가능하다. 더 이상 반짝 관심과 형식적 대응으로는 안 된다. 안전이 곧 생명이라는 확고한 신념으로 우리 사회를 변화시켜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