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꿈꾸는 시] 엄혜숙 '거미'

입력 2025-08-18 06:30:00

영주 출생, 전 경산시청 근무…2003년 '시사사' 등단
시집 '도문', '파도소리에 귀를 걸고'

엄혜숙 시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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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

끝없이 올라가고 싶었다

올라간들 다를 것 없는 세상 속을

흙 묻히고 살기보다는 빠질 수 있는 하늘이 좋아

허공에 햇살로 그물막 지어 살았다

관심 두지 않은 온갖 소리들이 기어 올라와

바람 흔들어 내 유리방을 슬그머니 헤집고 달아났다

그럴 때면 두고 온 어린 꽃들과

달빛 가득 고여있던 옹달샘이

발아래서 고즈넉이 앉아 손짓하며 불렀다

나는 거꾸로 매달려 떠나온 세상을 말없이 바라본다

뒤집어 바라보는 나무의 새살 대는 잎맥은

햇살을 튕겨 연녹으로 해맑게 비쳤고

시끄럽게 다투어 흐르던 강물은

투명한 목소리로 지줄대며 교향악을 연주한다

햇살 꺾기는 각도에 따라 달라 보이던 세상

오를 줄만 알아 허공에 몸 기대었던 나

햇살 소곤대는 토담 틈에 유리집 하나 지었다

담 너머 지켜보던 라일락 꽃나무

제 몸 화르르 풀어 던지며 인사하고 있다

어둡던 골목이 환하다

엄혜숙 시인
엄혜숙 시인

<시작 노트>

우리가 궁극적으로 바라보고자 하는 지점은 어디인가? 인간의 삶은 정답이 없고 완벽한 유토피아는 없다. 시인의 마음을 거미에 이입시켜 상상력의 진폭을 넓혀보았다. 이상향의 공간 속으로 세상을 조롱하며 올라가고 싶은 욕망도 있지만 이상향에서 모든 걸 비우고 버리며 구도자처럼 안도하는 삶과 통속적인 삶을 그리워하는 애증의 교차 지점에서 흔들리는 이상과 현실을 바라보다가 이상과 현실을 타협하여 중간지점을 모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