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학은 생명학이다.' 이 말은 '역사학은 행동학이다'라는 말과 짝을 지어 사용하는 내 역사이론이다. 역사와 달리 역사학은 기록을 근거로 해석해서 그 시대와 사람을 이해한다. 지나간 것들을 대상으로 삼기에 불가피한 점이 있지만 그것에만 의존하면 문제가 많다. 우리 역사, 특히 만주 지역에서 활동했던 고조선·부여·고구려를 이해하는데는 치명적인 한계들이 있다. 그런데 지금은 100년 전과 달리 사건의 니용과 사람의 성격 등 역사상을 다양한 학문, 심지어는 자연과학까지 활용하여 효율적으로 규명할 수 있다. 또한 사건의 현장들, 그들이 살았던 삶의 터전들을 직접 또는 간접으로 체험하고 정보를 구할 수 있다. 또 하나 현대는 역사의 주체를 과거와 다르게 인식하는 시대라는 점이다. 역사학의 연구 대상이 각종 권력을 장악한 사람들과 권력쟁탈 과정, 전쟁 상황, 지배자들의 생활과 문화만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소위 강단과 재야를 불문하고 역사를 연구하는 자세와 방법론을 대거 혁신해야만 한다.
◆부여인들은 말 잘 타고, 활을 잘 쐈다
그러한 점에서 부여의 역사, 즉 그들이 어떻게 살았고, 어떤 신앙과 세계관을 가졌는가를 이해하는 일은 중요하다. 우선 부여인들의 성격, 기질이 궁금하다. '삼국지' 고구려전에는 "교만하고 방자해졌다(後稍驕恣)"라는 기록이 있다. 나는 중국인들이 그 '교자'(驕恣)라는 단어 속에 숨긴 의미를 '자유의지'(free will)로 찾아냈다. 고구려가 부여의 기질을 계승하여 발전시킨 것이지만, 오랫동안 잊고 잃어버린 정체성의 핵이다. 또 부여전에는 이러한 글이 있다. "其人麤大, 性彊勇謹厚, 不寇鈔" 즉 부여 사람들은 크고, 성품이 강하고 용감하며, 근엄하고 덕이 두텁다. 때문에 침략하거나 노략질하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부여가 멸망할 즈음인 6세기 중반 무렵에 유민들이 두막루국을 세웠다. 대막루, 대막로, 달말루라고도 쓰여진 오랫동안 존속한 큰 나라이다. 그런데 '위서'의 두막루전에 "두막루국은 ~옛날의 북부여다(舊北夫餘也)라며 부여인들의 기질을 거의 똑같게 기록했다. 중국인들이 그것도 정사에서 주변의 이민족들을 이렇게 긍정적으로 평가한 예는 아주 드문 일이다. 부여를 그 시대 동아시아 세계에서는 다 그렇게 평가했다는 증거이다.
이러한 기질을 가진 부여인들은 말(名馬)을 잘 탔고, 활을 잘 쐈다. '삼국사기'에 주몽은 부여의 속어로서 '활을 잘 쏘는 사람'이라는 뜻이라고 기록했다. 추모(주몽)는 북부여의 천제인 해모수의 아들이다. 동아시아 고대문화의 주역이면서 우리와 문화적으로 종족적으로 가까운 동이(東夷)의 '이(夷)'라는 글자는 큰활을 뜻하기도 한다. 5월 말에 국제실크로드 학술회의 때문에 태원을 방문했다. 고구려의 모본왕이 AD 49년에 1천km 이상 달려 공격했던 곳이다. 부여나 고구려 등은 말 타고 달렸고, 유목민족들의 활과 구조가 같은 예맥의 활을 사용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삼국지'에는 "고구려에서 우수한 활이 나오는데 이것을 맥궁이라고 부른다"고 하였다. 호궁(好弓), 각궁(角弓), 단궁(檀弓) 등의 이름으로 불리워진 최고의 활인데, 그 기원은 부여이다.
◆부여인들은 어떤 음식을 먹었나?
그럼 부여인들은 어떤 음식들을 즐겨 먹었고, 조선시대 등의 음식들과는 어떤 차이가 있었을까? 음식은 자체가 사람과 사회의 기질을 만드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먹거리를 구하는 일 자체가 사회전체의 시스템, 즉 산업, 신앙 등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7천년 전의 유적지인 요녕성의 심양의 신락(新樂) 유적에서 콩의 화분이 발견됐다. 또 두막루, 발해의 수도권이었던 흑룡강성의 영안현, 길림성의 연길현에서 발견된 큰 콩은 약 3천년 전의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지'에 나타난 '선장양'(善醬釀)이라는 기록처럼 고구려인들은 발효 기술이 뛰어나 메주를 만들었다. 묘주가 진(鎭)인 평양 근처인 덕흥리의 고구려 고분의 벽화 묵서에는 "...아침에 먹을 鹽豉(소금과 메주)를 충분히 마련했다"라고 기록하였다. 그렇다면 부여인들이 콩을 발효시켜 메주(豉)를 담그고 된장(청국장)을 만들었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기술이 훗날 일본으로 건너가 낫토(納豆)를 만들게 한 것이다.
그럼 부여인들은 조선 시대처럼 곡식과 채소 등 농작물만 먹었을까? 700년 어쩌면 더 이상일지도 모르게 존재한 부여는 중핵 지역인 송화강 수계망 유역과 주변의 분지 지대가 온화하고, 완만한 평야와 초지, 산지대가 혼합된 생태공간이었다. 거기에 흥안령 등의 크고 두터운 산록들, 동만주의 거대한 숲과 강도 '생활권'(living zone)이었다. 때문에 농경과 사냥, 목축, 심지어는 어업까지 함께 할 수 있는 '다중 생활권' 속에서 살았다. 그러므로 고구려 고분 벽화와 기록들에서 보이듯 동물들을 사냥해서 육식도 즐겼고, 과일과 버섯 약초, 꿀, 산삼을 생산했다. 서북만주 지역에서는 축산업이 발달했으니 필시 요구르트도 만들어 먹기도 하고, 화장품으로도 애용했을 것이다. 인류는 강가와 해안가의 어렵으로 문화가 시작됐다(물가 문화설)고 한다. 부여의 생활권이었던 만주의 곳곳에서는 신석기 시대의 어업 유적들이 발견됐으니 부여인들은 강어업이 성행했다. 거기에다 동부여 등은 동해로 이어졌으니 훗날 동예처럼 바다 생선도 먹었을 것이다. 이러한 식품환경이라면 부여의 귀족들은 부침개 종류도 만들어 먹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부여인들의 의상은?
우리와 달리 만주 지역에서 살았던 부여 사람들은 어떤 옷을 입었을까? 한국인들은 조선시대를 다룬 엉터리 사극을 보면서, 또 문익점의 목화씨 밀수(?) 때문에 우리는 옷조차 제대로 못 입었던 민족으로 오해를 했다. 물론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 '삼국지'의 오환·선비전에는 부여인들이 "백색의 옷을 숭상하고 상중에는 남녀가 모두 흰옷을 입었다(居喪, 男女皆純白)." 또 "흰옷을 숭상하여 흰 삼베(白布)로 만든 소매가 큰 포와 바지를 입고 가죽신을 신었다"고 썼다. 실은 (동)예 또는 예맥도 삼베가 산출되며 누에를 쳐서 옷감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심지어 통일신라는 유명한 비단 수출국이었다. 중국학자들은 부여의 핵심영토였던 길림 지역을 '천잠 문화권' 즉 가장 좋은 비단이 생산되는 문화권이라고 불렀다.(고조선 문명권과 해륙활동)
부여의 귀족층들은 금, 은으로 모자와 옷을 장식하였는데, 금이 많이 생산됐기 때문에 가능했다. 고구려는 금 수출국으로 유명했는데, 기록에 보이듯 그 대부분은 부여 지역에서 생산한 것이다. '삼국지' 등에도 부여에서는 붉은 옥(루비 계통)이 나고, 큰구슬은 크기가 대추만 하다고 기록했다. 실제로 길림 지역에서는 청동기 시대의 돌상자 무덤에서 '백석관'이라는 연옥 제품이 나왔다. 뿐만 아니라 추위 탓도 있지만 값비싼 모피옷도 즐겨 입었다. '삼국지'와 '후한서'의 부여전에는 여우·삵괭이·원숭이·담비가죽·살괭이 등이 생산됐다고 기록했다. 지금도 숲이 발달해서 온갖 동물들이 서식한다. 현지의 박물관에 들어가면 앞 방부터 온갖 동물들을 박제로 재현해 놓았을 정도이다. 모피는, 특히 동만주와 연해주의 담비가죽은 선사시대부터 근대까지도 유라시아 세계에 엄청난 고가로 팔린 무역상품이었다. 그래서 조선, 부여, 고구려는 물론이지만 훗날 발해는 일본에서 무역역조 현상을 일으킬 정도로 모피를 대량 수출했다. 이러한 풍속과 수출은 재료도 좋지만 공예산업이 발달한 때문이다.
◆부여인들이 즐겨한 놀이? 신앙?
부여인들은 어떠한 놀이들을, 어느 정도로 즐겼을까? 고대 사회에서 놀이들은 사냥이나 농사, 어업 등의 생산행위와 직결됐지만, 한편으로는 신앙과 연결됐다. 사상이나 철학, 종교, 조직적인 교육기관이 부족한 고대 세계에서 신앙이란 단순한 종교행위를 넘어 인간과 종족의 탄생, 국가의 건국, 집단의 가치관 등을 교육시키는 '전범'(charter)이고, 윤리를 함께 실습하는 공동체 '의례'(ritual)이기도 했다.
고구려는 조상과 해, 달, 별, 하늘과 더불어 각종 신들을 모셨다. 특히 해신인 고등신(추모)과 물 또는 동굴(穴)로 상징되는 부여신(유화부인)이 양대 축을 이루었다. 중국의 『위서』 고구려에는 요동성이 당나라의 군대에게 점령당할 위기에 놓이자 부여신을 상징하는 소상(인형)이 사흘 동안이나 피눈물을 흘렸다고 썼다. 또 고구려 궁성에는 부여신을 모신 사당이 있고, 사당 안에는 나무로 만든 부인상이 안치되어 있었다. 추모는 해모수의 아들이고, 유화부인은 해모수의 부인이고, 동부여의 태후였다. 결국 부여의 신앙을 계승한 것이다.
우리는 태양을 '해'라고 부른다. 북부여의 천제인 해모수는 '해'(太陽)와 '모시'(池)에서 기원한 조화된 이름이다(이병도). 해모수의 자식은 해부루(解扶婁)이다. 동명(東明)은 빛과 관계가 깊다. 이처럼 부여, 고구려를 위시한 예맥족은 해를 신령스럽게 여겼고, 고구려도 전기의 왕들은 '해'(解)로 성으로 삼았던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 환웅, 고구려와 신라 등의 임금들 명칭, '조선', '부여', '한국' 등의 국호, 태백산 백두산 등의 산 이름, 그리고 강과 언덕, 마을의 이름에는 해와 연관된 것들이 매우 많다. 그 근원에 부여가 있는 것이다. 놀라운 일이지만 유화부인을 모신 신모신앙은 조선 후기까지 평양지역에 남아있었을 정도였다.
이러한 신앙심을 갖고 살아가던 부여인들이기에 죽음 또한 독특하게 받아들여 장례문화가 유별났다. 『삼국지』에는 부여인들은 장례를 무조건 5월에 치렀는데, 만일 다른 달에 죽으면 5월까지 시신을 보존했고, 얼음을 사용해서라도 시신이 부패되는 것을 늦추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기록을 5개월 동안 장례를 치른 것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고조선과 마찬가지로 순장의 풍습이 있어서 "~순장(殉葬)시키는데, 많을 때는 백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어쩌면 이러한 장례풍습은 유라시아 뮤목민들의 장례풍습과 연관이 있을 수도 있다.
부여인들은 독특한 세계관을 가졌기 때문에 제사를 지내면서도, 장례를 치루면서도 즐겁게 놀이를 했다. '후한서'에는 부여가 "섣달에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매일 큰 모임을 가져 술 마시고, 노래 부르고, 춤추고 논다. 이것을 '영고'(迎鼓)라고 한다." 또 '삼국지'에도 "밤낮없이 길에 사람이 다니며, 노래하기를 좋아하여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는다(行人無晝夜, 好歌吟, 音聲不絶)"고도 기록했다. 이렇게 놀이를 좋아하는 부여인들의 기질이 고구려, 신라 등을 거쳐 지금 한류로 계승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은 부여인들의 기질이 있다. 고구려인들도 가졌던, 오랫동안 우리의 기억에서 사라진 '자유의지'(free will)이다.
부여는 조선처럼 생태환경이 단순하고, 생태경계가 고정된 국경선의 국가가 아니다. 만주라는 다변화된 생태 환경 속에서 다양한 산업과 문화를 자율적으로 발전시켰고, 순환적으로 생활권을 확장하는 역사유기체로서 존재했다. 잊혀진 나라, 잃어버린 땅의 역사인 부여는 복원이 필요한 기억의 공간이며, 현재 한민족의 정신 세계와 유전적 기질과 연관된 내면의 유산이다. 그리고 그 유산은 고구려에게 전달됐다.
역사학자·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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