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멈춘 듯…중세가 살아 숨 쉬는 도시
천년 고도, 세 종교 유적지 간직…엘 그레코·타치아노·고야 등
톨레도대성당에 걸린 명작들 '베드로의 눈물' 깊은 여운 남겨
◆ 엘 그레코, 베드로의 눈물
올 여름 장마가 시작됐다. 누군가 꼼꼼하게 모아 둔 '장마' 시 40편을 촘촘히 읽어내려 가는 한낮, 시편엔 무거운 잿빛 구름과 우레, 빗물에 휩쓸려 가는 붉은 꽃이며 툇마루 천장에서 길게 쳐져 내려오다 제 자리로 또 무겁게 기어 올라가는 거미까지 가득하다. 늘어진 물푸레 곁에 핀 함박꽃도 안간힘을 다해 젖은 몸을 추스른다. 그렇게 곳곳에 산재한 물의 방(房)에 누워 떠내려가듯 시를 읽다 문득 톨레도대성당에서 본 엘 그레코의 성화(聖畵) '성 베드로의 눈물'을 떠올린다.
성화에는 구름에 싸인 새벽 하늘을 배경으로 화면에서는 나타나지 않은 위를 응시하며 치켜 뜬 커다란 베드로의 눈망울에서 하염없는 눈물이 흘러내린다. 또 두 손을 깍지 낀 채로 기도하는 자세와, 있는 힘껏 힘을 주어 드러난 팔과 손의 강직하고 역동적인 근육에서, 스승을 배반한 그의 죄스러움과 슬픔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
한없이 슬픈 그림이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다 주님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이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베드로가 가로되 내가 주님과 함께 죽을지언정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우리가 익히 아는 대로 베드로는 그 날 스승을 세 번 부인했고, 영원히 '우는 사람'으로 살다 순교했다.

◆가톨릭, 유대교, 이슬람교가 공존하는 도시
스페인 수도 마드리드에서 1시간 남짓 버스로 달려 도착한 천년 고도 톨레도는 경북 경주처럼 고즈넉했다. 톨레도는 기원전 2세기 로마 식민 도시에서 8세기 서고트 왕국의 수도로, 그 후엔 이슬람의 지배를 받으면서 가톨릭, 유대교, 이슬람교 등 세 종교의 유적지가 공존하는 도시가 되었다.
무어인들이 지배하던 시기에는 유명한 '톨레도의 칼'을 만든 철제와 경공업이 크게 발달한 황금시대를 구가했으며, 레콩키스타('재정복'을 뜻하는 스페인어로, 약 7세기 반에 걸쳐서 이베리아 반도에서 기독교 왕국들이 이슬람 세력을 축출하고 영토를 회복한 일련의 과정을 의미하는 용어)이후 1561년 펠리페 2세가 마드리드에 성채를 지어 천도하자 비공식 수도로서의 지위를 잃고 침체기를 겪기 시작했다.
톨레도 전망대에서 바라본 거의 원형 그대로인 도시의 시간은 중세에서 멈춘 듯했다. 타호강이 물도리처럼 휘감은 도시 가장 높은 곳엔 로마시대 요새인 알 카사르가 여전히 군사박물관으로 사용되고, 13세기에 지어진 톨레도대성당은 고딕, 초기와 후기 르네상스, 무데하르, 바로크, 로코코 양식을 모두 보여주는 건축물로 건재한다. 톨레도대성당은 특히 이베리아 최고(最古) 성당답게 서고트 왕국 시절 도입된 옛 히스파노-모사라베 예법 미사가 매일 열린다고 한다.
고백하자면 '성 베드로의 눈물'을 필자는 톨레도대성당 앞 서점 진열장에 펼쳐둔 도판으로 처음 보았다. 그 직전까지 필자는 엘 그레코를 그리스 크레타 출신으로 베네치아와 로마에서 활동하다 스페인으로 건너온 르네상스 끝물 화가쯤으로 알았다. 더군다나 그 과문함에 보태 라파엘로, 티치아노, 벨라스케스, 고야, 렘브란트 등이 가득한 프라도미술관을 톨레도에 앞서 들러오기까지 했으니.

◆작품이 즐비한 톨레도대성당
크레타섬 이콘화가로 이미 주목받던 그는 베네치아화단의 대가 티치아노의 제자로 높은 인문학 지식과 깊은 신심으로도 인정받는 화가였다. 하지만 피렌체, 로마화단의 거장들이 워낙 이탈리아에서 득세하던 때라 펠리페 2세의 궁정화가가 되고자 스페인행을 택했던 그는 균형과 사실적인 르네상스식 그림을 원했던 황제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해 그 꿈을 이루지는 못했다.
그의 세로로 길게 표현한 인물, 과감한 구도를 취한 화력은 곧 이은 매너리즘, 아니 바로크를 훨씬 뛰어넘어 20세기 초 인상주의와 추상, 표현주의에까지 영향을 끼치게 되는데, 이를테면 그는 3백년쯤 일찍 세상에 온 천재였던 것이다.
톨레도대성당 사제들 제의실 앞에 걸린 '그리스도의 옷을 벗김'은 프레스코화나 템페라화가 아닌 베네치아화단의 조르조네가 창안한 캔버스 유화다. 그 그림 또한 강렬하고 거대한 감동을 주었지만 나는 오른쪽 옆에 걸린 작은 '성 베드로의 눈물' 앞에서 오래 움직일 수 없었다.
나중에 멕시코 소우미야미술관과 오슬로미술관에서 같은 제목을 단 그림들(총 16점이 있다.)을 보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스탕달 신드롬 또는 일종의 법열(法悅)이랄까. 희안한 경험이었다.
톨레도 대성당에는 그 외에도 금, 은, 보석 180kg으로 만들어진 높이 3m가량의 성체 현시대, 그라나다 함락 장면을 세밀하게 묘사해 놓은 성가대석, 외부의 빛을 끌어들여 더할 데 없이 신성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트란스 파란테, 시인 구상의 시에 실렸던 가난하고 힘든 자들을 어깨에 메고 강을 건네주는 거인 성 크리스토퍼 등 수많은 티치아노, 고야의 작품들이 즐비하다.
특히 성당 정면 지옥의 문, 용서의 문, 심판의 문은 최후의 심판일에 열린다고. 5분 거리에 있는 산토 토메 성당엔 엘 그레코 최대 걸작으로 알려진 '오르가스 공작의 매장'이 순례객들을 불러모으고 있다.

◆돈키호테의 길, 산초의 길
엘 그레코에 취해 넋을 놓고 있다가 길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톨레도의 오래 된 좁은 길은 미로처럼 얽혔고 일행들은 행방이 묘연하다. 점심 먹을 식당 이름은 들은 듯한데, 타호 강변에 있다고 했는데, 혼자 중얼거리며 네모난 돌들이 촘촘히 박힌 길을 뛰듯 걷다가 책을 든 세르반테스를 만났다.
그러고 보니 기념품 가게마다 로시난테를 탄 돈키호테와 산초 피규어를 늘어놓았다. 그렇다. 세르반테스는 한때 톨레도에 가까운 바야돌리드에서 살았고, 풍차 즐비한 소설 속 무대 라만차가 여기서 멀지 않다.
'감히 이룰 수 없는 꿈을 꾸고, 감히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고, 감히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견디며, 감히 용감한 사람도 가보지 못한 곳으로 가며, 감히 닿을 수 없는 저 밤하늘의 별에 이른다는 것, 이것이 나의 순례요, 저 별을 따라가는 것이 나의 길이라오. 아무리 희망이 없을지라도, 또한 아무리 멀리 있을지라도. … 누가 미친 거요? 장차 이룰 수 있는 세상을 상상하는 내가 미친 거요? 아니면 세상을 있는 그대로만 보는 사람이 미친 거요?'

세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가 중 한 명으로 여겨지는 미겔 데 세르반테스 사아베드라는 1547년 마드리드의 대학가 에나레스에서 일곱 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하급귀족 가문의 이발사를 겸한 외과의여서 좀 더 나은 삶을 찾아 여기저기 옮겨 다니느라 가족들이 스페인 여러 곳을 떠돌았다. 빚 때문에 옥살이도 했다. 세르반테스의 유년은 가난과 비참함 그 자체였다.
22세 때 군인이 되어 레판토해전에 참가했으나 부상으로 왼손 장애를 가지게 되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해적에게 잡혀 알제리에서 5년간 노예 생활을 하게 된다. 다행히 트리니티 탁발 수녀원에서 그를 위해 해적들에게 몸값을 지불해 마드리드로 돌아와 군사 식량을 납입하는 식량 조달원, 세금 징수원으로 일하지만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또 여러 번 투옥된다.
1585년 첫 소설 '라 갈라테아'를 출판하였으나 인기를 별로 끌지 못하다가 1605년 감옥에서 구상한 '돈 키호테' 제1부를 발표하여 대단한 인기를 모으지만 판권을 팔아버려 생활에는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1615년 '돈 키호테' 제2부를 완성했지만 평생 가난하게 살다가 숨질 때까지 트리니티 탁발 수녀원의 일을 도왔다.
1616년 4월 23일 향년 69세로 세상을 떠나 그 수녀원에 묻혔다. 매년 4월 23일은 생전 일면식도 없었지만 같은 날 영국에서 세상을 떠난 셰익스피어와 함께 기려 '세계 언어의 날' '세계 책의 날'로 전 세계인들이 기념하고 있다.
해질녘 그라나다를 향해 가는 길, 올리브나무들은 끝없이 이어지고 라만차의 풍차들도 언뜻 차창을 스쳐 지나간다. 저 풍차를 향해 돈키호테는 돌진했을 테고 산초는 허겁지겁 주인의 뒤를 좇았을 것이다. 간난(艱難)하기 짝이 없었을 세르반테스의 생애를 생각해보니 인생이란 게 참으로 희극 같은 서글픔 아닌가 싶다.

시인 박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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