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지명에 새겨진 삶과 시대상…국립대구박물관 특별전

입력 2025-06-17 15:38:14 수정 2025-06-17 15:47:59

중국 섬서한당석각박물관 기증 특별전
'만세불후(萬世不朽)-돌에 새긴 영원'
시대의 기록, 다양한 서체 담겨…8월 31일까지

귀순현주 석각조서 탁본. 당대(唐代) 문서의 사례가 희소한 상황에서, 황제의 조서 원문의 특징을 잘 유지한 채 돌에 새겨져 있어 학술적으로 의의가 크다. 국립대구박물관 제공
귀순현주 석각조서 탁본. 당대(唐代) 문서의 사례가 희소한 상황에서, 황제의 조서 원문의 특징을 잘 유지한 채 돌에 새겨져 있어 학술적으로 의의가 크다. 국립대구박물관 제공
나충 묘지명 개석 탁본. 지석에는
나충 묘지명 개석 탁본. 지석에는 '능곡지변(陵谷之變)을 우려해 이 묘지명을 제작한다'는 내용이 들어있어, 봉분 붕괴 등에도 후손이 조상의 무덤을 식별할 수 있도록 한 기능적 목적을 갖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국립대구박물관 제공

묘지명은 고인의 이름과 생애를 기록해 무덤에 함께 묻는 글로, 죽은 이를 기리는 동시에 살아 있는 사람들이 그를 어떻게 기억했는지를 보여주는 자료이기도 하다. 그 안에는 개인의 삶을 넘어 당시 사회의 가치관과 질서, 이상이 반영돼있으며 이는 역사 기록에 담기지 못한 다양한 이야기를 전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이러한 묘지명의 가치를 살펴볼 수 있는 전시가 국립대구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다.

'만세불후(萬世不朽)-돌에 새긴 영원'은 지난해 중국 섬서한당석각박물관으로부터 기증 받은, 남북조시대부터 당나라에 이르는 석각 자료 탁본 58건 75점을 소개한다. 이해를 돕기 위해 묘지문 탁본과 토용 5건 7점도 함께 전시됐다.

◆삶과 시대상 담아낸 묘지명

전시는 총 세 개의 주제로 구성된다. 1부 '세상을 담다'는 중국 남북조시대(386-589)의 정치적 상황과 종교적 배경을 소개한다. 이 시기는 여러 왕조가 흥망을 거듭한 분열의 시기이자 불교가 국가적 차원에서 수용된 종교적 전환기이기도 했다. 또한 이민족 왕조가 한족문화에 동화되며 중국 문화를 흡수하는 과정에서 묘지명이 유행하기 시작했고, 형식과 내용이 발달해 정형화된 시기가 바로 이때다.

2부 '이야기를 새기다'는 묘지명의 제작 목적과 역할, 내용 구성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묘지명을 만들어 무덤에 함께 묻는 일은 장례 의례의 일부였으며, 후대에는 예제(禮制)로 정착했다. 또한 무덤의 유실을 우려해 기능적 목적을 수행하고자 이름과 가계, 사망 및 장례 과정까지 충실하게 기록했다.

묘지명의 글을 쓴 '서자(書者)'와 묘지명의 글을 지은 '찬자(撰者)'의 존재는 묘주와 주변 인물 간의 사회적 관계망을 드러내며, 부부 합장 묘지명은 혼인과 가족 구조를 반영해 당시 사회의 질서를 파악하는 단서가 된다. 묘지명이 단순한 비문을 넘어 삶의 방식과 기억의 형태를 집약한 시대의 기록물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3부 '일생을 쓰다'는 8세기 이후 제작된 묘지명을 중심으로 당시 사람들의 삶과 이를 구성하는 시대와의 관계를 조명한다.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이들, 유교적 이상을 반영한 남성과 여성의 모습이 담긴 묘지명을 살펴본다. 또한 시대의 혼란을 피해 은거한 인물들의 묘지명을 통해 당시의 정치·사회적 격동이 개인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실감할 수 있다.

구양씨 부인 묘지 개석 탁본. 당(唐)의 명필 구양순의 손녀 묘지다. 살찐 획과 미끈한 운필, 장식적 획법을 보이는 예서 글씨가 눈에 띈다. 국립대구박물관 제공
구양씨 부인 묘지 개석 탁본. 당(唐)의 명필 구양순의 손녀 묘지다. 살찐 획과 미끈한 운필, 장식적 획법을 보이는 예서 글씨가 눈에 띈다. 국립대구박물관 제공
조선과 부인 왕씨 부부 묘지명. 부인이 왕희지의 후손임을 명시해 당대 명필에 대한 존경을 나타냈다. 국립대구박물관 제공
조선과 부인 왕씨 부부 묘지명. 부인이 왕희지의 후손임을 명시해 당대 명필에 대한 존경을 나타냈다. 국립대구박물관 제공

◆탁본으로 만나는 다양한 서체

묘지명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고 형식을 갖추게 된 위진남북조시대는 서예가 본격적인 예술로 발돋움한 시기. 때문에 비석에 새겨진 다양한 서체는 전시를 보는 즐거움을 더한다.

전시품은 대부분 판독성이 뛰어난 해서(楷書)나 예서(隸書)가 대부분이다.

'구양씨 부인 묘지'는 당(唐)의 명필 구양순(557-641)의 손녀 묘지로, 지석에 새겨진 예서가 특히 주목된다. 살이 찐 듯한 획과 유려한 운필, 장식적인 마무리는 예서 특유의 고전적 품격을 잘 보여주며, 고인의 삶을 기리는 글에 어울리는 차분하고 섬세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또한 '조선과 부인 왕씨 부부 묘지명'은 부인이 왕희지의 후손임을 명시하며, 단순한 가계 소개를 넘어 당대 명필에 대한 존경과 문화적 위상을 함께 보여준다. 개석에는 권위와 상징성을 지닌 전서(篆書)를 사용해, 묘지 전체에 장식성과 격조를 더하고 있다. 개석이 남아 있는 전시품들을 통해 전서체의 변화 양상도 엿볼 수 있다.

전시 기간 중 7월 4일에는 전시 연계 강연이 진행되며 ▷큐레이터와의 대화(7월 16·30일, 8월 13일) ▷묘지명 탁본 체험(7~8월 중 매주 토요일)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운영될 예정이다.

국립대구박물관 관계자는 "묘지명에 기록된 다양한 인물의 서사는 시간과 공간을 넘어선 인간애에 대한 공감을 이끌어낸다"며 "이름조차 잊힌 이들의 생애가 돌 위의 글로 남아 오늘날 우리를 만나듯, 시간과 공간을 넘어 기억이 연결되는 순간을 마련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이어 "이번 전시를 통해 관람객들에게 멀게만 느껴졌던 묘지명을 매개로, 당시 사람들의 삶과 생활상을 더욱 가깝고 친숙하게 느끼고 서체와 문장을 통해 고대 중국의 서예문화의 흐름도 함께 살펴볼 수 있길 바란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