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잘못 인정하라' 포항 촉발지진 피해주민들의 이유있는 항변

입력 2025-06-17 16:45:52 수정 2025-06-17 20:53:51

2심 패소 판결에 지역사회 강한 실망감과 분노
 포항 정치계·법률전문가·지질학계·시민단체 등 대응방안 마련에 한목소리

지난 2017년 11월 15일 포항시 북구 흥해읍에서 지진이 발생하자 주민들이 임시대피소인 흥해실내체육관 강당에 가득 들어서 있다. 이곳은 지난 2021년 10월 19일 마지막 주민이 퇴소할 때까지 무려 4년이나 이재민들의 쉼터로 활용됐다. 매일신문DB
지난 2017년 11월 15일 포항시 북구 흥해읍에서 지진이 발생하자 주민들이 임시대피소인 흥해실내체육관 강당에 가득 들어서 있다. 이곳은 지난 2021년 10월 19일 마지막 주민이 퇴소할 때까지 무려 4년이나 이재민들의 쉼터로 활용됐다. 매일신문DB

2017년 포항 촉발지진 발생 당시 정부는 피해주민들에 대한 국비를 지원하면서 손해배상 대신 '피해구제지원금'이란 용어를 썼다.

정부합동조사단에서 당시 지진이 국책사업인 지열발전소의 물 주입으로 인해 발생한 '인재'라고 발표된 이후에도 정부는 끝까지 이 단어를 고집했다.

포항의 시민사회단체는 물론 지역 정치권도 책임회피라며 비난의 목소리가 높았지만 달라진 것은 없었다.

8년이 지난 후 포항 촉발지진 정신적 손해배상 항소심에서 또 한 번 정부의 책임을 부정하는 판결이 나오자 참아왔던 주민들의 마음속에는 이제 깊은 분노가 자리 잡고 있다.

2018년 11월 13일 포항시 북구 환호동의 한 다세대주택. 포항 지진으로 발생한 붕괴 잔해물들이 1년이 지나도록 남아있다. 매일신문DB
2018년 11월 13일 포항시 북구 환호동의 한 다세대주택. 포항 지진으로 발생한 붕괴 잔해물들이 1년이 지나도록 남아있다. 매일신문DB

◆두 번의 지진, 무너진 일상

포항시는 2017년 11월 15일 국내 관측 사상 두 번째로 큰 5.4 규모의 지진과 이듬해 2월 11일 4.6 규모의 여진을 겪었다. 규모는 두 번째지만 피해는 한반도 지진 재난 역사상 가장 컸다.

정부 집계 결과 당시 포항 지진으로 사망자 1명, 부상자 117명, 이재민 1천797명의 인명 피해와 함께 5만5천95건의 시설물 피해가 발생했다.

직·간접 피해추정액은 3천323억원에 달했다. 무엇보다 50만 포항 시민이 현재진행형으로 겪고 있는 지속적인 불안감과 공포 등 심리·정신적인 피해는 수치로 환산할 수 없을 정도로 막대하다.

지진 발생 이후 지난 2019년 피해주민들의 정신 회복을 위해 포항트라우마센터가 건립됐다.

센터에 따르면 지진이 발생 8년 지났지만 아직도 상당수의 시민들이 정신적인 두려움과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지진 트라우마로 고통받고 있는 주민들은 "정부 조사 및 감사원 감사 등을 통해 정부 스스로 지열발전 사업과 지진의 인과관계를 인정했음에도 최근 2심 재판부가 법 상식을 무시한 채 뒤집기 판결을 했다"며 분노하고 있다.

포항 지진을 촉발한 포항시 북구 흥해읍의 지열발전소 모습. 현재는 모두 철거된 채 지진관측시스템이 설치돼 있다. 매일신문 DB
포항 지진을 촉발한 포항시 북구 흥해읍의 지열발전소 모습. 현재는 모두 철거된 채 지진관측시스템이 설치돼 있다. 매일신문 DB

◆정부도 인정한 인재

지난 2019년 3월 정부합동조사단은 "국책사업인 포항 지열발전소 사업 과정에서 지하 공간에 과도하게 물을 주입하면서 지진이 촉발됐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감사원 역시 2020년 4월 지열발전사업 추진과정에서 사업 주체인 산업통상자원부 및 에너지기술평가원 등의 안전관리 방안과 대응조치 부실 등 총 20건의 위법·부당 행위가 있었음을 밝혀냈다.

지진 위험성을 알고도 적절한 조치를 하지 않았으며, 산업부의 무리한 지시로 오히려 사업 범위와 규모가 확대되는 등 각종 문제점이 드러났다는 충격적인 결과였다.

2021년 7월 국무총리 소속 포항지진진상조사위원회도 지열발전사업 수행자인 ㈜넥스지오·한국지질자원연구원·서울대 컨소시엄의 과실을 밝혀내고 사법수사를 의뢰했으며, 검찰은 이들을 지난해 8월 업무상 과실치사상 혐의로 기소했다.

이처럼 여러 번의 정부기관 조사를 통해 포항지진이 명백한 인재임이 판명되자 포항시민들은 정부를 상대로 지진 트라우마에 따른 정신적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지난 2023년 11월 1심 재판부인 대구지방법원 포항지원은 이러한 정부 조사에 기반해 배상책임을 인정하고 지진 발생 당시 포항시에 거주한 주민들에게 200만~300만원의 위자료 지급을 판결했다.

그러나 지난달 13일 진행된 항소심에서 대구고등법원은 국가의 배상책임을 전면 부정했다.

2심 재판부는 "감사원 감사, 진상조사위원회 조사 등에서 지적한 업무의 미흡사항은 있다고 인정하지만, 공무원이나 관련기관의 과실로 포항지진이 촉발됐다고 인정할 만한 충분한 입증자료가 없다"며 손해배상 청구를 기각했다.

해당 재판은 포항 시민들이 상고하며 현재 대법원 판결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또한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과학적인 조사와 국가조사 보고서를 통해 인재로 확인된 촉발지진에 대해 책임 당사자의 배상 책임을 부정한 것은 정의와 상식에 벗어난 결정"이라며 릴레이 시위를 진행하고 있다.

2019년 4월 2일 오후 포항시 육거리에서 열린
2019년 4월 2일 오후 포항시 육거리에서 열린 '포항지진피해 특별법 제정 촉구를 위한 시민 결의대회'에서 3만여 명의 시민들이 정부의 지진피해 배상을 촉구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매일신문DB

◆똘똘 뭉친 포항 '정의로운 판결을'

재판이 장기화되면서 포항은 모처럼 진영을 떠나 단합된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지역 정치권 역시 여야 상관없이 잇달아 성명서를 발표하며 "긴 시간 동안 단 한 차례의 정부의 공식 사과조차 받아보지 못하고 여태껏 작은 진동에도 두려움을 느끼는 주민들의 고통을 깊이 헤아려 대법원에서는 공정하고 정의로운 판결을 내려주길 기대한다"고 한 목소리를 냈다.

포항시는 법률전문가·지질학계·시민단체 등과 함께 향후 대응방안 마련을 위해 임시조직도 구성했다.

우선 항소심 판결 직후 시민 혼란을 최소화하고 상고절차, 소송진행상황 등 소송 관련 정보 제공을 위해 시민안내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지질학 전문가와 변호사 등 법률전문가 등은 2심 판결의 주요 쟁점을 분석해 대법원 상고 대응 전략을 논의하는 한편 대시민 토론회를 통해 시민사회의 다양한 목소리를 정부에 전달할 계획이다.

지난 11일에는 포항시·시의회·국회의원이 함께 대법원에 정의로운 판결을 촉구하는 호소문을 전달했으며, 상고심 대응과 병행해 포항 촉발지진의 정신적 피해에 대한 일괄 배상을 위한 관련 입법 추진을 정부 및 국회에 지속 요구할 방침이다.

이강덕 포항시장은 "대법원은 국가기관과 전문가가 밝혀낸 촉발지진-지열발전사업 간 인과관계를 분명히 인식하고, 피해 주민들의 고통과 피해 실상을 반영해 공정하고 정의로운 판결을 내려주실 것으로 기대한다"면서 "시민의 법적 권리 회복과 피해 치유를 위해 진실이 밝혀지고 정의가 바로 서도록 시민과 함께하겠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