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신 굶지 않으리…" 다짐하며 보릿단 '탁탁' 후려쳤다
'생산비 못 건지고 빚만 진 농사 그만'…풍년 꿈꾸며 뙤약볕 아래 도리깨질
군사정부, 농어촌고리채정리법 공포…농·어민 부채 탕감 재기 희망 안겨줘

1961년 6월, 악몽과도 같은 보릿고개를 넘어 이제 수확의 계절. 들마다 골마다 농부의 땀방울이 보리이삭으로 맺혔습니다. 배고파 울음마저 막힌 갓난아이에게 농부의 아내는 빈 젖을 억지로 물리고서야 구슬땀을 식힙니다.
"엄마 올해는 풍년이제?" 기아는 철없는 어린놈까지 죽도록 싫어하는 대원수. 보리밭 둑에 웅크린 첫째는 그래도 컷다고 엄마의 아린 속을 달래줍니다.
사각사각 보리를 베는 아빠의 낫질이 고랑을 지나는 동안, 이삭을 줍는 엄마 눈에는 안도의 이슬이 반짝였습니다. 이제 다시는 배고프지 않으리. 굶지 않으리….
오뉴월 땡볕에 콩죽 같은 땀이 흐르는 보리타작. 들판에 홀로 선 첨성대 옆에서 농부들은 보릿단을 후려치고, 또 도리깨질로 한알한알 이삭을 떨굽니다. 논 갈아 씨뿌리고 호미로 밭을 메고 낫으로 베어 묶어 말리고…. 아버지, 할아버지가 해 오던 방식 딱 그대로, 여태 농사는 오직 인력으로 지어왔습니다.
생산비도 못 건지고 잔뜩 빚만 진 농사를 짓는다고, 바쁜 농사철엔 학교 갈 아들 손까지 빌려야 했습니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것도 서러운데 아이의 앞날까지 가로막는 건 아닌지, 도리깨를 휘두르는 농부의 두 팔에는 괜한 자책과 분노가 치밉니다.
"농민을 착취하던 고리업자는 이제 발도 못붙이고 빚은 거뜬히 갚게 해준데…." 주막집부터 보리타작으로 부산한 산골 외딴집까지 반가운 소식이 날아들었습니다. 이제 좋은 세상이 온다고? 정말 이 원수 같은 빚을 덜 수 있단 말인가?
소문은 빈말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인구의 80%가 살던 농·어촌에는 연 20%의 고리채(高利債)가 만연했습니다. 보릿고개를 넘기 힘든 농민들은 지주에게 장리(長利)쌀을 빌려 먹고 가을에 이자 5할을 붙여 갚았습니다. 장리쌀이 얼마나 무서웠는지 '저녁 죽 삼년이면 논이 서마지기'란 말도 생겨났습니다.
그해 '5·16혁명'으로 들어선 군사정부는 이 살인적인 고리채에 칼을 빼 들었습니다. 6월 10일 '농어촌고리채정리법'을 공포하고, 농·어민들을 대상으로 고리대금업을 일체 금하도록 했습니다. 이어 농·어민이 고리채를 신고하면 채무를 탕감해 주기로 했습니다.
탕감 방식은 농업은행이 농업금융채권으로 고리대금업자에게 고리(20%)의 빚을 대신 갚고, 농·어민에게는 장기(5년) 저리(12%) 융자로 갚게 하고 나머지(8%)는 탕감해 준다는 것. 이에 따라 그해 말까지 신고된 금액 480억 환 가운데 약 250억 환이 고리채로 판명돼 농·어민들은 큰 걱정을 덜었습니다.
그러나 갑작스런 법 시행으로 사금융이 마비돼 급한 돈 꾸기가 어려워지는 등 부작용도 많았습니다. 고리채정리사업은 절망하는 농·어민에게 빚을 탕감해 재기의 희망을 안겨준 해방 후 첫 조치로, 이후 정부 정책의 길잡이가 됐습니다.
1962년은 극심한 가뭄으로, 1963년은 구질구질한 봄비와 끝 모를 장마로 보리농사는 흉년을 면치 못했습니다. 보리 증산운동이 한창이던 1966년에는 예상 수확량이 무려 평년 대비 210%. 단군 이래 대풍이 들었다며 기대가 컸지만 이번에는 보리 수매 가격이 폭락하는 바람에 농사를 잘 짓고도 '풍년 파산'을 맞아야했습니다. (매일신문 1961년 6월~ 1966년 6월)
절대 빈곤의 시대였던 1960년대 농민들은 흉년도 걱정, 풍년도 걱정이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농민들의 근심은 똑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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