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도의 맛 제사상처럼 차려 지렁(국간장) 넣고 비벼요
'헛'은 인간의 욕망이 개입된 빔이라 할 수 있다. 채움보다 비움, 그건 힘이 아니라 일종의 세월(歲月)의 내공이랄 수 있다. 하지만 비움은 쉽게 도달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그것은 삶의 바닥을 핥은 뒤에야 꿈꿀 수 있는 거룩한 대지(大地)라 할 수 있다.
숱한 밥이 있다. 그런데 경상도에는 타 도시에선 발견할 수 없는 흥미로운 밥이 있다. 바로 '헛제삿밥'이다. 그 밥은 지난 시절 가난한 유생들의 애환이 스며 들어가 있다.
◆헛제삿밥 기원
서원에서 공부하던 유생들이 깊은 밤까지 공부하다 출출해지면 제사음식을 차려 놓고 축과 제문을 지어 풍류를 즐기며 허투루 제사를 지낸 뒤 먹던 음식이 바로 헛제삿밥이라 한다.
1925년 최홍년(崔汞年)이 지은 '해동죽지'(海東竹枝)에 '우리나라에서는 제사를 지낸 음식으로 비빔밥을 만들어 먹는 풍습이 있다. 그러나 평상시에는 제삿밥을 먹지 못하므로 제사음식과 같은 재료를 마련하여 비빔밥을 먹는데 이것을 헛제삿밥이라 한다'란 구절이 나온다.
제사 음식에는 마늘, 파, 고춧가루를 사용하지 않는다. 불교계 사찰음식에도 '오신채'(五辛菜)라 해서 마늘, 부추, 파, 달래, 흥거 등 자극성이 강한 다섯 가지 양념을 사용하지 않는다. 이걸 날것으로 먹으면 화를 잘 내게 하여 수행을 방해한다. 또한 음란한 마음을 일으키기 때문에 불가에서는 금기시 한다.
기제사, 솔직히 민초에겐 배불리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설렘의 시간'이다. 자시(子時·밤 11시~오전 1시)에 나타나는 조상신은 음식에서 풍겨나는 향기에만 응감한다. 냄새가 귀신들의 주식이다. 그런데 산자들이 좋아하는 고춧가루, 마늘, 파 등 자극성 강한 양념이 가해지면 귀신들이 먹질 못한다고 선조들은 믿었다. 기본적인 상차림으로 3적(육적, 어적, 소적(두부적)), 봉적(닭찜)과 3탕(명태, 건홍합, 피문어), 3색 나물(숙주, 고사리, 시금치), 문어숙회, 김치, 상어 돔배기, 밥, 국 등이 올라간다.
제사상이 그렇듯 나물 가짓수도 반드시 홀수여야 하고 한번 무치고 나면 절대로 다시 무침 하지 않았으며 간장 깨소금 참기름 외에 다른 조미료를 넣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고춧가루가 들어간 찬은 내놓지 않는 데 비해 헛제삿밥에는 예외적으로 배추김치라든가 고춧가루가 들어간 찬이 올려진다.
현재 헛제삿밥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세 도시가 있다. 안동, 진주, 그리고 대구 정도이다.

◆안동 헛제삿밥
안동은 자타가 공인하는 '한국정신문화의 수도'. 또한 헛제삿밥의 고장이다. 당연히 제사문화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그 핵이랄 수 있는 '불천위 제사'. 그 대상자가 무려 49명. '국불천위'(國不遷位)란 가문 최고의 영광이다. 충현의 학풍과 인품을 후대에 기리기 위해 국가가 영원히 사당에 모시기로 한 성스러운 위패이다.
아무튼, 안동에서 가장 먼저 헛제삿밥을 상품으로 개발한 사람은 누굴까? 바로 작고한 조계행 할머니다. 조 할머니는 1978년 안동댐 입구에 있는 안동민속촌 안에서 '안동 민속음식의 집'을 열었다. 거기서 헛제삿밥을 전국에서 처음 상품으로 선보인 것이다. 초창기엔 웃지 못할 일이 비일비재했다. 제사문화에 문외한인 일부 외지 관광객들은 그게 기제사 때 음복하는 제삿밥인줄 모르고 그냥 '안동 비빔밥'으로 생각해 고추장을 찾았다. 조 할머니는 그게 그냥 비빔밥이 아니고 헛제삿밥이란 사실을 알려준 뒤 그 음식에는 고추장을 넣으면 안 되고 '지렁'(국간장)을 넣어야 법식에 맞고 맛도 제대로 볼 수 있다고 친절하게 설명해줬다. 장사가 잘되자 그 이듬해 '까치구멍집'이 생겨나면서 이후 5개 업소가 집단으로 몰린다.
초창기에는 메뉴가 간단했다. 밥·나물·제기·탕·간장·전이 전부였다. 하지만 상에 올라간 간고등어와 상어 돔배기는 관광객들에게 강하게 어필된다. 또한 후식으로 나온 생강과 고춧가루 냄새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안동식혜도 입소문이 난다. 그런데 세월이 가면서 곁반찬이 너무 적다는 관광객들의 지적 때문에 조기, 멧국수, 물김치 등 추가 메뉴가 생긴다.
안동 민속의 집은 그 이후 하회탈춤의 백정 역할로 인간문화재가 된 이상호·방옥선 부부에게로 넘어간다. 조 할머니는 94년쯤 식당을 아들에게 넘기고 자신은 하회마을 입구 탈박물관 건너편에 '옥류정'을 열지만 이것도 2002년 타인에게 넘어간다. 까치구멍집은 최근에 타계한 손차행 할머니한테서 며느리 서정애한테 가업이 이어졌다.
안동민속촌 내 헛제삿밥촌은 감사원으로부터 철거명령을 받는다. 그곳이 문화재 보호구역이었기 때문이다. 2000년쯤 안동 민속의 집과 까치구멍집이 함께 현재 자리로 이전한다. 현재 안동에서 헛제삿밥만 전문적으로 내놓는 식당은 월령교 앞 두 곳, 그리고 하회마을 하회식당과 청기와 식당 정도이다.

◆안동의 조리법
안동 헛제삿밥은 밥 옆에 나물이 이웃하고 그 앞에 탕(湯)·전(煎)·적(炙)이 세트를 이룬다. 산적에 간고등어와 상어 돔배기가 들어가는 게 특이하다. 탕 재료는 육·해·공에서 다 나온다. 어탕(어물로 끓인 것)·육탕(소고기로 끓인 것)·채탕(채소 위주로 끓인 것), 이 삼탕이 섞인 막탕이 된다. 헛제삿밥을 먹을 때는 나물에 고추장을 넣지 않고 깨소금, 간장으로 간을 해 비벼 먹는다.
나물은 무, 콩나물, 고사리, 도라지, 숙주나물(일명 묵나물) 등 5채를 사용한다. 놋그릇에 올려지는 먹거리 구성도 흥미롭다. 배추·다시마·동태전, 호박부침개, 소고기 산적, 간고등어, 상어 돔배기, 삶은 계란 등 9가지가 올려진다.

◆진주 헛제삿밥
진주는 광복 이후 서너 곳이 영업했는데 60년대에 자취를 감춘다. 현재 금산면 갈전리 '진주헛제삿밥'이 유일하다. 초대 여사장 이명덕은 합천 출신인 친정 어머니(이달순)가 봉래동에서 음식을 팔 때 잠시 헛제삿밥(1982년 진주시청 근처 '강나루 헛제사밥' 오픈)을 취급했지만 찾는 이가 별로 없어 취급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지금 자리로 이전해왔다. 현재 아들 내외(김창우·양은영)가 가업을 이었다. 2000년 김영복 식생활문화연구소장의 권유로 헛제삿밥 전문점 시대를 연다. 이 무렵 안동시는 안동 헛제삿밥을 진주비빔밥처럼, 그리고 진주시청은 헛제삿밥과 냉면을 특화한다. 김 소장은 당시 부산방송(PBS)을 통해 진주 헛제삿밥을 재현해 반향을 일으킨다. 이명덕은 이후 <사>대한명인협회로부터 '진주 헛제삿밥 명인'으로 선정된다. 현재 이명덕은 아들 내외(김창우·양은영)와 함께 일을 한다.
초창기에는 주방에서 요리할 때 제사 분위기를 위해 향불을 켜기도 했다. 이젠 세상이 달라져 향 냄새를 꺼리는 손님도 있고 해서 향은 치웠다.
진주 헛제삿밥은 안동 헛제삿밥과 다른 점이 몇 가지 있다. 일단 비늘이 없는 돔배기와 간고등어는 사용하지 않는 사실이다. 여긴 조기, 민어, 돔 등이 메인 생선이다. 안동에서 즐겨 보이는 배추전과 명태전도 여기선 보이지 않는다. 안동권에서는 나물을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내지만 진주에선 나물에 칼질하는 걸 그다지 반기지 않는다. 보통 비빔밥은 젓가락을 사용해 비비는 줄로 알고 있었는데 진주 헛제삿밥은 숟가락으로 비빌 것을 주문한다.
이곳 나물 그릇에는 안동보다 2가지가 더 들어간다. 숙주나물과 미역이다. 탕국도 안동식보다 더 복잡하게 들어간다. 마른 문어·홍합·새우·명태를 비롯해 오징어, 조갯살, 두부, 무, 표고버섯, 죽순, 닭뼈 육수 등 무려 13가지가 들어간다. 토막 낸 두부와 무의 크기도 안동의 4분의 1 정도.
전체적으로 진주 헛제삿밥은 안동식보다 더 푸짐하다. 6가지 모둠전(육전, 어전, 버섯전, 부추전, 산적 등), 그리고 마지막엔 생선찌개 같은 일명 '진주식 거지탕'이 특식으로 나온다. 조기 등 말려 놓은 갖은 생선을 넣고 신선로처럼 푹 끓여낸 것이다.
◆대구 헛제삿밥의 차림
구한말까지 대구 헛제삿밥이 유명할 수밖에 없는 특별한 이유는 뭘까? 대구‧경북의 제례 음식문화부터 잘 살펴봐야 할 것이다. 대구의 헛제삿밥에는 조기가 올라가고, 청어 철에는 청어가 올라가지만 반드시 올리는 게 '상어 돔배기'다. 지금도 경상도 사람들은 귀한 손님이 오셨을 때나 잔칫날, 그리고 명절과 제사 때에는 꼭 돔배기를 상에 올린다. 특히 대구의 제사상에 올리는 돔배기를 만드는 상어는 '양지'라 해서 귀상어를 제일로 친다. 돔배기를 쪄 올리기도 하지만 보통 돔배기 산적으로 만들어 올리기도 한다.
돔배기 산적도 모양에 따라 '바대산적'과 '써래산적'이 있다. 아이 손바닥에서 어른 손바닥 크기로 형편에 따라 썬 돔배기를 세 개에서 다섯 개씩 꼬챙이에 나란히 꿴 '바대산적'은 일반적인 제사상에 올린다. 써래산적은 조상의 묘를 찾아 가 지내는 묘제 때 올린다. 써래산적은 폭 5㎝, 길이 25㎝ 정도로 길게 썬 돔배기를 각각 하나씩 꼬챙이에 꿴 것이다.
2022년 전통식문화 연구가인 김영복, 그리고 힐링푸드 연구가인 김영은 씨가 대구시 남구 이천동 한 너와집에서 대구식 헛제삿밥을 재현했을 때 필자도 맛을 봤다. 상어돔배기, 조기, 삼색나물, 두부전, 소고기산적, 백김치, 식혜, 지렁 등이 상에 올랐다.
wind30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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