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교황 예술 순례] <3>바티칸미술관-피나코테카에서 벨베데레까지

입력 2025-05-20 13:37:20

박미영 시인

바티칸미술관 입구.
바티칸미술관 입구.

1377년 그레고리오11세가 70년 간의 아비뇽 유수(Avignon 幽囚)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로마교구 주교좌였던 라테라노궁은 황폐하기 짝이 없었다. 이로 인해 5세기경 세워져 로마를 방문하는 외국 사절을 접대할 때만 사용되던 바티칸궁이 교황의 정식 주거지로 확정됐다. 이후 수세기에 걸친 증·개축으로 근대에 이르러 천사백 개가 넘는 방과 천 개에 달하는 계단, 스무 개의 안뜰, 수천 채의 건물이 늘어선 장중하고 웅장한 바티칸이 됐다.

교황청은 중세 초기부터 근대까지 다른 주권국가에 대한 배타적인 속권(俗權)을 행사하며 교황령으로 통치했다. 교황령은 콘스탄티누스 1세, 동로마제국이 세운 '로마공국', 756년 프랑크왕국 피핀3세의 기증으로 확보된 영토로 건국됐다. 그 후에도 믿음이 깊은 부자들이 증여한 라티푼디움(대농장), 호전적인 교황들의 영토 확장 전쟁 등 로마를 중심으로 이탈리아반도 중부에서, 아비뇽 유수 시기부터 1787년(프랑스혁명)까지 아비뇽도 포함될 정도로 드넓었다.

그러나 고대에서 중세를 거쳐 근대까지 1천300여 년 동안 수없이 많은 부침을 겪은 교황령은 1870년 통일전쟁에 승리한 이탈리아왕국(Regno d'Italia)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2세에 의해 결국 완전히 소멸됐다. 모든 영토를 잃어버린 교황들은 성 베드로대성당과 그 주변 좁은 공간에 사실상 갇혀 지내다가(바티칸 유수) 1929년 교황 비오11세와 이탈리아 독재자 무솔리니 간 체결한 라테란조약으로 세계 최소형 국가 바티칸시국, 즉 현재의 교황령이 탄생됐다. 그때 협약한 내용 중 역대 교황이 수집한 막대한 예술품들과 바티칸이 소유한 모든 미술품들을 공개하라는 조항이 바로 바티칸미술관의 시작이다.

바티칸미술관은 단일 박물관이 아니라 24개의 전시관과 갤러리들이 하나로 묶여 있는 형태라 밖에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넓다. 소장작품 7만여 점, 전시작품 2만여 점으로 특히 고대 로마의 유물과 성베드로대성당, 시스티나성당, 라파엘로의 방 건물 내부 자체가 미술관인 경우와 대부분 브라만테,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산 가로, 마델로, 베르니니 등을 비롯한 건축, 조각, 회화 르네상스, 바로크 거장들이 짓거나 그린 것이라 소장품의 가치는 환산조차 불가능할 정도다.

1506년 에스퀼리노언덕 포도밭에서 발견된 라오콘을 율리오2세가 구입해 벨베데레정원에 진열해 공개한 것을 학계에서는 바티칸미술관의 시초로 보고 있다. 1771년 클레멘스14세가 수집한 고대, 르네상스시대 조각품을 토대로 비오6세가 확대해 두 교황의 이름을 따 비오클레멘스 미술관이라고 명명했다. 비오7세의 키아라몬티미술관과 브라치오 누오보, 1836년 에트루리아미술관, 1839년 이집트미술관이 각각 개관했다. 1854년 비오 그리스도교미술관, 1932년, 보르자아파트에 있던 기존 회화관(피나코테카)이 재개관, 1973년 현대종교미술 컬렉션이 개관했다.

라오콘 군상.
라오콘 군상.

회화의 방 피나코테카(Pinacoteca)에선 18개 전시실에 역대 교황들이 수집한 회화 460여 점을 12세기부터 19세기까지 시대순으로 볼 수 있다. 부자간으로 여겨지는 니콜로와 조반니의 황금바탕 목판화 '최후의 심판'부터 원근법의 시초를 보여주는 조토의 '스테파네시 삼면화' 안젤리코의 '성니콜라오' 포를리의 '바르톨로메오 플라티나를 바티칸도서관장으로 임명하는 식스토4세' 동서양 음악교과서 표지화에 애용되는 '천사들' 프레스코화, 라파엘로의 스승 페르지노의 '성모자' 10대, 20대, 30대 라파엘로가 그린 '성모의 대관' '폴리뇨의 성모' '변용' 앞에선 모두 넋을 잃게 된다.

레오나르드 다 빈치의 '성예로니모' 앞에선 그가 왜 이 그림을 미완성으로 뒀을까, 왜 목 부분과 몸이 분리된 채 누더기로 각각 발견됐을까, 그가 왜 1516년 늦가을 '모나리자'를 나귀에 싣고 알프스를 넘었을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듯하다. 그러다가 카라바조의 '매장' 앞에 서면 칠흑 같은 배경에서 훅 달려드는 강렬한 빛 때문에 화들짝 놀라게 된다. 푸생의 '성에라스모의 순교' 귀도 레니의 '성베드로의 십자가 처형' 젠틸레스키의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들고 있는 유디트'를 보며 바로크시대의 정서 폭발이 이렇게 생생하단 걸 현대 감각으로 느끼게 된다.

바티칸미술관 입구 윗부분은 무솔리니와의 라테란조약으로 바티칸을 되찾은 비오11세의 문장과 왼쪽에는 미켈란젤로, 오른쪽은 라파엘로가 조각돼있다. 바티칸엔 스무 개의 정원이 있으나 전문 투어를 신청하지 않으면 단테의 신곡 속에 나오는 거대한 솔방울과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양옆 계단, 1990년대 포모도로의 '천체 안의 천체'가 있는 피냐 정원과 이어지는 벨베데레정원만 볼 수 있다.

팔각 아치형 벨베데레정원 감실엔 바티칸미술관의 초석이 된 라오콘군상을 만날 수 있다. 목마를 트로이 성내에 들여서는 안 된다 경고했던 것이 당시 그리스 편에 서 있었던 포세이돈의 심기를 건드려 두 아들과 함께 바다뱀의 공격을 받는 그 라오콘이다. 메두사의 머리를 들고 있는 페르세우스, 태양과 예술의 신 아폴로 앞에서 '고대에 이미 조각은 완성됐다' 탄식한 미켈란젤로의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박미영 시인
박미영 시인

하지만 바티칸 미술관은 이제 시작이다. 미술사가 케네드 클라크가 예술계의 햄릿이라 일컬은 다빈치를 프랑수아1세의 클로 뤼세성에서 우수와 신비에 찬 고독한 말년을 보내게 한 큰 이유가 됐던 라파엘로의 방들과 미켈란젤로의 경당을 만날 여정이 이제 시작이니 말이다.

박미영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