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진오의 대구경북의 집이야기]행복한 집이 여기 있네, 소년 태일의 옛집

마당 한켠에는 전태일과 가족이 살던 셋방 터가 남아 있다.

◆소년의 흔적이 배인 골목

남산동 후미진 골목을 굽이굽이 따라 들어가면 소년이 살던 옛집이 있다. 소년은 그 집이 자신이 살았던 삶에서 가장 행복했던 집이라고 했다. 집도 사람처럼 우여곡절을 겪는 생명체다. 이 집 역시 그렇다. 노후를 이유로 하마터면 헐릴 뻔했다. 소년의 행복이 머물던 집을 살리기 위해 시민들이 나섰다. 십시일반 정성을 보태어 집을 매입하고 고쳤다.

어떤 집은 시대의 풍랑에 쓸려 사라지고 어떤 집은 기억의 불씨 위에서 다시 태어난다. 소년의 옛집은 고운 손길들이 모여 마침내 부활했다. 시민들이 무너지려던 기둥을 다시 세우고, 공동의 기림이 기와가 되어 지붕으로 얹혔다.

한때 남산동은 미로처럼 얽힌 골목과 오래된 단층 근대 한옥이 어우러진 고즈넉한 정취가 매력인 동네였다. 그러나 지금은 고층 아파트가 즐비하게 들어섰고, 그 기세에 눌린 집과 집 사이 골목들은 하나둘 자취를 감추고 있다. 다른 동네에 비해 정겨운 골목과 아담한 서민의 집들이 남아 있긴 하지만 풍경은 예전 같지 않다.

소년의 옛집에 닿기 위해선 골목을 정성스럽게 걸어야 한다. 발품을 팔며 가는 방법을 택하면 더욱 좋다. 옛집에 이르는 거리와 골목이 한층 마음을 가다듬어 준다. 어쩌면 이런 태도야말로 소년의 생애가 녹아든 집에 대한 예의일 것이다. 걷다 보면 골목 어딘가에서 소년이 흥얼거리던 콧노래 소리가 들리고 친구와 어깨를 맞대던 발걸음 소리가 조용히 따라온다.

소년의 집을 품은 골목은 '희망길'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골목 입구에 선다. 멀지 않은 곳에 천주교 대구대교구의 정문이 활짝 열려 있다. 정문 너머가 '성(聖)'의 공간이라면 밖은 '속(俗)'의 자리다. 성의 공간이 하늘을 향해 열려 있다면 속의 자리는 땅을 딛고 선다. 그러나 이런 구분이 마냥 온당해 보이지는 않는다. 사람의 삶이란 언제나 성과 속의 경계 어딘가에 있기 때문이다. 소년의 삶도 그러했을 터이다.

희망길 안으로 조심스레 발을 디딘다. 좁은 골목에 소년의 흔적이 얼마나 깊게 스며 있을까. 길을 따라 몇 걸음을 더 옮기자, 작고 단정한 집 한 채가 오도카니 앉아 있다. 소년 전태일의 대구 옛집이다. 이 집에 처음 온 게 언제였던가. 남산동에 전태일이 살았던 집이 있다는 걸 알게 된 뒤로 이곳을 가끔 들른다.

전태일이 가장 행복한 게 산 집을 시민들이 마음을 모아 마련해 주었다.

◆내일이 설렌 소년 태일이

왜 그랬을까. 왜 전태일이 살았던 이 집을 찾아오게 되었을까. 전태일은 고단한 생의 한켠에서 남산동 집에 살던 시절이 가장 행복했다고 일기에 남긴다. '행복'이라는 말이 가시처럼 목에 걸렸다. 그랬구나, 이 집에서 행복했구나. 전태일의 고백이 마음속에 오래 머물렀고, 마침내 나를 일으켜 이 골목, 이 집 앞으로 데려다 놓았다.

전태일과 가족이 살던 곳은 지금 복원된 본채가 아니다. 본채는 주인이 살았고 전태일 가족이 살았던 곳은 주인집 옆방 한 칸이 전부였다. 비좁아 터질만한 방에 온 가족이 다 함께 누우면 옴짝달싹하기도 곤란했을 텐데, 그래도 소년은 그 시절이 가장 행복했다고 썼다. 헐벗은 나날이지만 소년은 내일을 꿈꿨다.

옛집에서 명덕역 쪽으로 걸어 나간다. 저만치 앞서, 소년 태일이 걷고 있는 듯하다. 그 뒤를 따라 몇 걸음을 더 옮기자, 덩굴장미가 곱게 핀 오래된 교정이 나타난다. 1940년 4월 5일, 대구남산정공립심상소학교로 문을 연 지금의 명덕초등학교다. 한때 교정에는 청옥고등공민학교가 자리하고 있었다. 소년이 짧게나마 배움의 기쁨을 누린 학교다.

전태일 가족은 부친의 잦은 사업 실패로 대구와 부산, 서울을 떠돌았다. 어디 그들만 그랬을까. 대처를 전전하며 하루하루를 견딘 가족들이 그 시절엔 적지 않았다. 어린 전태일은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몇 번이나 집을 떠났다. 지독한 가난이 너무 일찍 어린 그를 덮쳤다. 그럼에도 희망을 지피며 살았다. 바로 이 집, 남산동 골목의 셋방에서 말이다.

남산동 집에서 가족은 정신 없이 생업에 뛰어든다. 태일은 부친을 도와 미싱 보조로 일하며 고역의 삶을 감당한다. 1963년, 가난이 일상이던 해다. 그해 5월, 모친의 손길로 그는 청옥고등공민학교에 입학한다. 사람은 배울 때 행복하다. 배우면 마음이 차오르고, 차오르면 삶이 조금은 덜 아프다. 고됐지만 학교에서만큼은 마음이 충만했다.

본채는 전태일과 이소선 여사, 조영래 변호사를 기리는 작은 기념관으로 복원되었다.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부친이 태일에게 재봉 일에만 매달리라며 강요한다. 태일은 억장이 무너진다. 가난이 문제였다. 결국 태일은 더 배우고 싶은 의지로 동생 태삼과 서울행 기차에 오른다. 서울로의 가출은 태일을 참혹한 노동 현실 속으로 이끈다. 집을 나온 태일을 기다리는 건 더 큰 가난과 그 가난을 방조하는 냉혹한 사회였다.

그 냉혹한 사회는 지금 바뀌었을까? 단언하기 어렵다. 거리 어디엔가 여전히 또 다른 태일이 있을지 모른다. 그렇기에 이 옛집을 복원한 의미는 더욱 각별하다. 이 집은 단순히 낡은 건물을 되살린 것이 아니다. 되살아난 것은 태일의 짧지만 분명했던 행복이다. 누구는 그를 가난한 집안의 아들로, 또 누구는 신문을 팔고 구두를 닦던 거리의 부랑아로, 또 누구는 부조리에 항거한 노동 열사로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이 집에서의 태일은 다르다. 작은 방 한 칸, 고단한 잠 속에서도 내일이 설렜다. 그는 벗 원섭을 사귀고 공부에 매진했다. 실장 역할을 맡을 만큼 선생과 벗의 신뢰를 받는다. 벗과 함께 운동장을 달렸고, 영어 단어와 수학 공식을 외웠다. 그 순간만큼은 태일은 더 이상 거리의 외톨이가 아니었다. 잠시나마 이 집에 머무는 동안 웃을 수 있었다.

◆고된 삶을 사랑으로 버틴 날들

오전 볕이 잘 드는 옛집 마당은 따스하다. 여섯 식구가 살았다던 셋방은 터만 남았다. 그 자리에 가만히 서 본다. 어디선가 재봉틀 소리가 들린다. 모친은 헌 옷과 구호품을 안고 들어오고, 아이들은 면도날로 실밥을 뜯는다. 부친이 옷을 수선하면 모친은 보따리에 싸 머리에 이고 먼 장터를 돌았다. 이 셋방에서 일군 삶이 이렇게나 치열하다.

옛집에서 명덕역 쪽으로 걸어 나가면 청옥고등공민학교가 자리한 명덕초등학교가 나온다.

담벼락을 등지고 의자 하나가 놓여 있다. 교실 의자를 형상화한 손영복 작가의 작품, '열여섯 태일의 꿈'이다. 그 의자를 가만히 응시한다. 의자에 앉은 열여섯 태일이 아른거린다. 소년은 따스한 볕을 고스란히 받으며 미소를 짓는다. 나도 그 의자에 조심스레 몸을 얹는다. 시선은 담장 너머 하늘로 천천히 오른다. 시선 끝에서 태일이 다녔던 청옥고등공민학교가 아련히 잡힌다.

셋방은 터만 남았으나 주인집은 기념관으로 복원되었다. 전시실 벽면에는 전태일의 말과 글이 빼곡히 붙어 있다. 어린 시절의 태일은 사진 속에서 수줍은 미소를 짓고, 다 자란 청년의 눈빛은 무언가를 꾹 참는 듯하다. "사랑하는 친구여, 받아 읽어주게"로 시작되는 유서는 참으로 아름답고도 아프다. 그 유서의 말들 앞에서 나는 침묵한다.

다른 벽면에는 방문자들의 엽서가 붙어 있다. 전태일에게 보내는 마음이다. 학생도, 노동자도, 어르신도 저마다의 말로 감사를 전한다. "노동자를 위해 희생하셔서 감사합니다", "당신의 존엄이 우리의 길잡이가 됩니다." 상투적인 추모가 없는 말들이다. 깊은 밤, 열여섯 태일이 걸어 들어와 이 엽서의 말을 읽어줄 거라 상상한다.

이 집은 정부나 지자체의 지원으로 복원된 게 아니다. 대구 시민들이 뜻을 모아 되살려낸 집이다. 한 소년의 행복이, 한 가족의 삶이, 한 시대의 아픔이 함께 되살아났다. 선한 마음들이 모여 사라질 뻔한 어느 소년의 기억을 남산동 골목으로 불러냈다.

이 집에는 한때 행복했던 소년이 있었다. 소년을 열사로만 기억하지 않아야 한다. 소년은 나락 같은 가난에 휘둘리면서도 자신의 삶을 함부로 버리지 않았다. 이게 바로 사랑이 아닌가. 그 사랑이 흐르고 흘러 평화시장 봉제공장 시다 소녀들에게 번졌다.

그리고 그 사랑은 마침내 거룩한 불꽃으로 타올랐다. 감당하기에 벅찬 고된 삶을 사랑으로 살아낸 소년, 전태일. 그 소년의 집이 여기 있다, 남산동에.

양진오 대구대 문화예술학부 교수

양진오 대구대 문화예술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