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 가고 싶었다. 어린 시절 기억이 오롯이 남아있는 곳이 어디일까? 어쩌면 아버지세대인 지금은 할아버지가 된 어르신과 586세대가 공유하는 기억들이 여전히 존재하는 그런 곳이 우리시대의 고향같은 곳이 아닐까 싶었다. 개발독재 시대와 선진국 문턱에 다다라 물질적 풍요를 누리기 시작한 시대의 접점이 그곳에는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역사와 문화 그리고 사람들이 한데 어우러질 수 있는 언제나 찾아가고 싶은 그곳, 의성에 가고 싶었다.
사방에서 화마가 덮쳤다. 불바다 속에 빠졌지만 고운사는 의연했다.화염방사기로 내뿜듯이 달려드는 거친 불길에 천년을 버텨 온 전각들의 운명은 바람 앞의 가녀린 존재에 불과했다.

마침내 불똥이 가운루, 우화루에 튀었다. 삽시간에 전각을 휘감으며 삼켜버린 화마에 검붉은 화염이 하늘로 치솟아 올랐고 1,000℃이상의 높은 온도로 구워진 기왓장들도 견디지 못하고 부서지고 깨지면서 내지르는 '타타닥닥..' 소리가 산문을 가득 채웠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가운루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고찰을 지키던 스님과 소방관들의 입에서 나지막한 신음소리와 더불어 독경소리가 새어나왔다.
의성산불의 화마가 지나간 다음 날 찾은 고운사는 불에 타다가 깨지고 그을린 범종(梵鐘)만이 덩그렇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 가운루와 우화루, 연수전, 극락전, 만덕당, 낙서헌 등 모든 것들이 불길에 희생됐다. '부처님의 가피'로 대웅전만이 홀로 살아남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현실이 믿기지 않았다. 온 산이 나무타는 냄새가 자욱했다.
천년을 버텨 온 고운사의 전각들이 하루아침에 사라졌다.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이 수도하면서 건립한 가운루(駕雲樓) 우화루(羽化樓)는 물론이고 조선 영조 때 어첩(御帖)을 봉안한 연수전, 만덕당과 종각마저도 화마에 희생됐다.
◆기억 속 고향같은 도시,의성
의성(義城)은 우리시대의 정겨운 고향 같은 존재다. 그곳엔 어린 시절 그대로의 고향집이 있고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늘 그 자리에 있다. 노인들만 가득한 '인구소멸'도시가 아니라 언제나 찾아갈 수 있는 기억 속 고향같은 도시, 의성이다.
역사적으로 (통일)신라와 고려를 이어준 고려 태조 왕건의 유산이 가득한, 그래서 '義로운 城'이다. 오래된 것들에 대한 익숙함과 아련함을 동시에 갖추고 있으면서도 미래를 준비해 온 중심이 아주아주 오래된 천년고찰 고운사였다. 지난 3월 발생한 의성산불은 고운사 뿐 아니라 적잖은 인명피해를 발생시켰고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파괴한 안타까운 일이었다.
[{IMG03}]◆산불
온 산이 불길에 휩싸였다.땅이 타고 하늘이 타고 마을이 송두리째 화마의 습격을 받았다.산불은 동시에 사방에서 공세를 펼쳤다.속수무책으로 산이 타고 절도 탔다.천년을 지켜 온 등운산 계곡 '사천왕'이 지킨 천왕문과 일주문을 피해 진입한 화마는 '가운루'와 '우화루'를 덥쳤고 기왓장 한 장 남기지 않았다.
세상을 소멸시키려는 듯 맹렬한 기세였다.불에 그을린 기왓장엔 극락왕생과 건강장수를 바라는 중생의 욕망과 그 속살을 드러냈다.검은 재 속에서 사라진 전각대신 우리 마음 속 부처가 살아났다. 울음을 삼키다 봄꽃이 피어났다. 진흙에서 꽃을 피우는 연꽃처럼 시커먼 잔해속에 핀 꽃들은 부처님 말씀 불법(佛法)을 전해주러 온 전령사인가.
사상 최악의 산불이 고운사를 덥쳤다. 의성사람들의 마음을 다독거려 준 정신적 지주였다. 임진왜란과 조선시대의 화재도, 6.25 전쟁의 참화도 비켜갔건만 의성산불은 피할 수 없었다. 무너진 전각들 앞에서 모두 깨우침을 얻는다. 우리가 집착해 온 장구한 역사와 일체의 물욕들이 한 순간에 잿더미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눈앞에서 봤다.

인간의 욕망과 집착이 얼마나 허망한 지를, 결국은 부처는 인간의 마음속에 꽁꽁 숨어있다는 것을, 내 마음속 불성을 찾아나서는 것이 삶이라는 것을 우리는 잿더미가 된 고운사에서 찰나의 순간이나마 깨달을 수 있었다. 그것이 '소신공양(燒身供養)'의 방식으로 대중에게 견성(見性)의 가르침을 준 가운루와 우화루 그리고 연수전일 것이다.
전각은 다시 복원하고 지으면 된다. 불탄 나무는 정성을 들여 다시 심어서 기르면 된다. 대신 속세의 인간들이 본성을 직시하고 부처의 깨달음을 얻었다면 산불로 전소된 고운사는 제 할 일을 다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폐허 주변에서 만난 원주스님의 얼굴에선 담담함이 배어나온다. 스님의 미소는 '절이 불탔어도 억겁의 인연인지 잿더미 속에서 다시 꽃은 제 뜻대로 활짝 피지 않느냐' 고 하는 것 같았다. 다시 고운사에는 스님들의 독경소리·목탁소리가 울린다.

◆그 절 고운사
고운사는 경상북도 의성군 단촌면 등운산 자락에 위치한 천년고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제 16교구 본사다. 신라 신문왕 원년인 681년 의상(義湘)대사가 창건했다. 신라가 백제에 이어 고구려를 멸망시킨 것이 668년이었으니 고운사는 통일신라의 통합의 원대한 꿈을 실현하기 위한 호국사찰이었다.
고운사는 당초 높은 구름인 '高雲寺'였으나 최치원(崔致遠)이 이곳에 수도하면서 가운루(駕雲 樓)와 우화루(羽化樓)를 건립한 후 자신의 호인 고운(孤雲)을 따 孤雲寺로 바뀌었다. 임진왜란 때는 사명대사가 의병인 승군(僧軍)의 전방기지로 활용했고 일제강점기에는 조선불교 31본산 중 하나로 호국불교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이번 산불로 소실된 <가운루>는 조선 중·후기의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는 누각으로 계곡을 가로질러 기둥을 세워 배치한 독특한 구조로 자연과 조화된 건물로 미학적·건축학적인 가치를 인정받았다. 2024년 7월 17일 보물로 지정됐지만 사라졌다. 우화루 역시 국가문화유산 지정여부를 두고 심의하고 있었다. 1238년 몽고의 고려전쟁으로 전소된 경주 황룡사 9층목탑처럼 목조누각의 운명은 안타깝다. 우화루의 호랑이벽화도 다시는 볼 수 없다.
아름다운 고운사 입구 아름드리 나무들로 가득하던 숲길은 산불의 참화를 아프게 한다. 그 길은 불길을 피하지 못한 나무들로 황갈색이 됐다. 숲은 죽어도 길은 그대로다. 잿더미에서도 다시 꽃을 피우는 자연의 힘은 위대하다. 다시 이 길이 푸른 숲길로 우리를 맞이해주는 날들을 기대한다.
'의성산불피해모금안내 농협 301-0198-0312-11 경북공동모금회(의성군)'

서명수 객원논설위원(슈퍼차이나연구소대표)didero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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