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민의 나무오디세이] 새색시도 시샘한 '국색천향(國色天香)' 모란꽃

입력 2025-04-27 13:29:20 수정 2025-04-27 17:48:41

아담한 키에 사람 얼굴만 한 큰 꽃…홍자색, 백색, 담홍색 등 색도 다양
시선 사로잡는 '농염한 자태' 뽐내

국립대구박물관 화계의 모란이 활짝 피어 있다.
국립대구박물관 화계의 모란이 활짝 피어 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이하 생략)

1934년에 『문학(文學)』지에 발표된 김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는」라는 시의 일부이다. 봄에 피는 모란꽃이 일찍 지는 까닭에 다시 꽃 피는 봄을 기다려야 하는 정서를 함축적이고 중의적으로 읊었다. 일제강점기의 지식인들이 가졌던 현실의 절망과 미래의 희망, 기다림의 대상을 모란으로 은유한 절창이다.

◆농염의 아름다움 '꽃의 지존'

영랑이 애달프게 노래한 모란꽃이 절정이다. 국립대구박물관의 화계(花階), 대구수목원의 전통정원, 대구 도심의 청라언덕, 경북 안동시 도산서원과 하회마을 등 곳곳에 진홍색 큰 꽃잎에 둘러싸인 노란 꽃술들의 은은한 향기가 상춘을 유혹한다. 올해는 꽃샘추위 탓인지 개화가 늦었지만 아담한 키에 풍성한 꽃잎의 자태로 풍기는 농염(濃艶)한 아름다움은 가히 '꽃의 지존(至尊)'이라고 부를만하다.

식물분류학적으로 모란은 앵글러 분류 방식으로는 미나리아재빗과, APG IV 분류 체계로는 작약과의 낙엽활엽관목으로 높이가1~2m까지 자란다. 사람 얼굴만큼 큼직하게 피는 꽃은 지름이 15cm 이상이고 색깔은 홍자색이 흔하지만, 백색, 담홍색, 홍색, 자색, 황색 등 다양하다.

조선 후기 서유구(徐有榘, 1764~1845)가 저술한 『임원경제지』의 화훼농사 백과사전인 『예원지(藝畹志)』에는 모란의 종류가 황색류 20종, 홍색류 148종, 분홍색류 25종, 자색류 28종, 백색류 56종과 함께 녹색, 청, 흑색, 갈색, 그라데이션과 같은 특이한 색상의 품종 등 수백 종의 이름이 나온다. 그 당시 조선에서 유명한 황모란, 백모란, 정홍모란, 낙양홍 등은 수백 년 전 고려 충숙왕이 원나라에 들어가 공주와 혼인함으로써 황제의 총애를 받고 고려로 귀환할 때 선물로 받은 품종이다.

대구수목원에 조성된 정원에 하얀색 모란꽃이 소담스럽게 피어 있다.
대구수목원에 조성된 정원에 하얀색 모란꽃이 소담스럽게 피어 있다.

◆모란의 상징성 주목

모란은 아름다움 자체로도 귀한 대접을 받지만 여러 가지 상징성으로 주목을 받는다. 대표적으로 부귀(富貴), 화왕(花王), 미인을 의미한다. 크고 탐스러운 모습을 군왕의 풍모에 비유하여 '화왕'이라고 했다. 특히 부잣집이나 고관대작의 뜰에서 봄날을 장식하는 손꼽히는 꽃나무다.

이런 이유로 옛 시인과 묵객들의 사랑을 듬뿍 받아왔다. 모란의 본고장 중국에서는 당나라 때부터 꽃의 아름다움에 대해 국색천향(國色天香)이라는 최고의 찬사를 보냈다. 백량금(百兩金), 곡우화(穀雨花), 낙양화(洛陽花), 화신(花神)으로도 불리며 적지 않은 전설과 일화를 낳았다.

『삼국사기』 제46권 설총(薛聰) 조(條)에 '꽃의 왕' 모란과 신하인 장미, 할미꽃에 대한 우화(寓話) '화왕계(花王戒)'가 나온다. 화왕인 모란이 외모가 아름답고 아첨을 잘하는 장미를 사랑스럽게 보았지만, 덕망이 높고 충직한 할미꽃의 모습에 감동하는 내용이다. 설총의 이야기를 들은 신문왕은 훗날 임금들이 경계하고 성찰하도록 기록으로 남겼다.

◆모란 진짜 향기가 없나?

본향인 중국에서 삼국시대에 한반도로 전해진 모란은 당시 사랑과 관심의 대상이었다. 『삼국유사』의 「선덕왕 지기삼사(知幾三事)」의 설화가 단적이다.

신라 선덕여왕 때 당나라 태종이 붉은색·자주색·흰색의 세 가지 모란 그림과 씨 석 되[升]를 보내왔다. 여왕이 그림의 꽃을 보더니 "이 꽃은 분명 향기가 없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씨를 뜰에 심도록 했다. 나중에 꽃이 피고 보니 여왕의 말이 맞았다. 신하들이 어떻게 모란꽃에 향기가 없는 것을 알았냐며 묻자 "꽃을 그렸는데 나비가 없으므로 향기가 없음을 알 수 있었다. 이것은 당나라 임금이 나에게 짝이 없는 것을 희롱한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이 이야기를 바탕으로 조선 실학자 이익(李瀷)은 「모란무향(牧丹無香)」이라는 밀봉시(蜜蜂詩)를 지었다.

나라 위해 헌신하는 꿀벌들의 그 정성 殉國忘身卽至誠·순국망신즉지성
마음 다해 위를 섬겨 꽃들을 사냥하지 勞心事上獵羣英·노심사상렵군영
모란꽃 떨기 속엔 어찌 오지 않는 걸까 牧丹叢裏何曾到·목단총리하증도
꽃 중에 부귀하다는 명성 피해서 라네 應避花中富貴名·응피화중부귀명

<『성호사설』 권5 「만물문」>

"모란이란 꽃은 가장 쉽게 떨어지는 꽃이니 부귀란 오래 유지하기 어렵다는 것을 비유할 만하고, 비록 화려하나 냄새가 나빠서 가까이할 수 없으니 부귀란 참다운 게 못 된다는 것을 비유할 만하다"고 평하고 벌이 여왕벌을 섬기기 위해 충성심에서 부귀의 상징인 모란꽃을 피한다고 보았다.

대구 청라언덕의 모란.
대구 청라언덕의 모란.

모란꽃의 종류가 다양해서 향이 없는 품종도 있었겠지만 요즘 품종은 아주 옅은 향기를 품고 있다. 벌과 나비가 모란꽃에 날아들지 않는 이유는 꽃에 꿀이 많지 않은 때문이며, 꽃이 귀할 때는 곤충들이 찾아든다.

당나라에서 보낸 모란 그림에는 왜 나비가 그려져 있지 않은 것일까? 모란꽃은 '부귀'를 상징한다. 나비를 뜻하는 한자 蝶(접)과 노인을 의미하는 耋(질)은 중국어로 발음이 같은 '디에(dié)'다. 질(耋)은 70~80세 어르신을 뜻하기 때문에 모란꽃에 나비를 함께 그리면 '부귀질수(富貴耋壽)'로 읽혀서 80세까지 부귀를 누리라는 제한된 뜻으로 해석된다.

예나 지금이나 오랫동안 부귀와 장수를 바라는 욕심은 굴뚝같은데 "80세까지만 잘 사세요"라는 말은 되레 모욕이 될 수 있기에 모란꽃에는 나비를 그려 넣지 않았다는 얘기다.

◆모란이냐, 목단이냐

『예원지』에는 모란(牡丹)의 이름 유래도 나온다. "모란이라는 이름은 대게 처음 생길 때 홍색 싹이 나는 모양을 본뜬 것이다. 사람들이 목단(牧丹)이라고 쓰는 말은 옳지 않다." 옛사람들은 커다란 모란꽃을 수꽃이라 여겼고 뿌리에서 돋아나는 새싹이 붉어서 수컷 牡(모)에 붉을 丹(란)자를 붙였다. 경상도에서는 모란보다 목단이라는 이름이 더 친숙하다. 국립수목원의 식물도감에는 모란이 정명이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는 모란과 목단을 같이 표준어로 쓰고 있다. 한약방의 약재명은 목단피(牧丹皮)라고 부른다. 특히 화투의 6월 혹은 여섯 끗을 나타내는 그림은 목단이라고 부른다.

대구 중구 남산동 천주교대구대교구청 성직자 묘지 입구 정원의 모란꽃.
대구 중구 남산동 천주교대구대교구청 성직자 묘지 입구 정원의 모란꽃.

안동지역에서 구전되는 「화전가」에는 여러 가지 꽃이 나오는데 모란꽃을 경상도식 발음인 '목당꽃'으로 부르며 으뜸으로 여겼다.

"……목당꽃은 꽃 가운데 임금이요 아흥다흥 장미화는 주지주지 피어 있고 ……"

화전가는 3월 삼짇날 무렵 부녀자들은 산천에 가서 찹쌀가루에 진달래 꽃잎을 얹은 화전을 부쳐 먹으면서 놀 때 부르는 노래다. 부녀자들의 노래에 등장할 만큼 모란이 모든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았음을 뜻한다.

조선 후기 유박(柳璞)이 쓴 『화암수록』 안에 「강인재의 화목구품」과 「화목구등품제」에는 모란을 각기 2품과 2등에 넣고 있다. 또 유박의 「화목28우」에는 모란을 정열적인 친구라는 의미의 '열우(熱友)'라고 평했다.

◆모란을 시샘한 어린 신부

고려시대엔 정원에 모란을 많이 재배하고 애호했다. 당대의 많은 문인들이 문학작품을 지었는데 문호 이규보(李奎報, 1168~1241)는 모란에 관한 작품을 누구보다 많이 남겼다. 「절화행」(切花行)이라는 시는 젊은 부부의 사랑과 정감 어린 대화를 세밀하고 간결하게 잘 나타냈다. 토닥거리는 질투 어린 감정은 21세기 '티키타카'에 못지않다.

진주 같은 이슬 머금은 모란꽃 牡丹含露眞珠顆(모란함로진주과)

꺾어든 신부 창밖을 지나다가 美人切得窓前過(미인절득창전과)

방긋이 웃으며 신랑에게 묻기를 含笑問檀郞(함소문단랑)

꽃이 예쁘나요, 제가 예쁘나요? 花强妾貌强(화강첩모강)

신랑이 짐짓 장난스럽게 檀郞故相戱(단랑고상희)

꽃이 당신보다 예쁘구려! 强道花枝好(강도화지호)

여인은 그 말 듣고 토라져 美人妬花勝(미인투화승)

꽃을 밟아 뭉개며 말하기를 踏破花枝道(답파화지도)

꽃이 저보다 더 예쁘거든 花若勝於妾(화약승어첩)

오늘 밤 꽃과 함께 주무세요 今宵花同宿(금소화동숙)

<『대동시선(大東詩選)』>

대구 서구 와룡산 자락 가르뱅이공원 입구의 주택가 모란꽃.
대구 서구 와룡산 자락 가르뱅이공원 입구의 주택가 모란꽃.

◆모란에 얽힌 상반된 재상들 모습

모란에 얽힌 재상들의 재미있는 두 가지의 에피소드는 요즘 공직자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있어 소개한다. 먼저 고려 신종 때 재상 차약송(車若松, ?~1204)의 이야기다. 어느 날 조회를 마친 뒤 동료 기홍수(奇洪壽)와 더불어 중서성(中書省)에 앉아서 공작과 모란을 기르는 것에 대해 서로 묻고 답했다.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이 질타했다. "재상의 직책은 도(道)를 논하고 나라를 경륜함에 있는데, 다만 화조(花鳥)를 논하고 있으니 어찌 백관의 자세라고 하겠는가?" 공과 사를 구별하지 않고 공석에서 개인적인 취향을 얘기했다가 『고려사』 열전의 '흑역사'로 기록돼 있다.

반면 조선 효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시백(李時白, 1581~1660)의 일화는 공직자 자세의 본보기다. 그의 집 뜰에는 중국에서 가져온 아주 색다른 모란 '금사낙양홍'이 있었다. 호사가들이 많이 구경한다는 소문을 임금이 듣고 내시를 시켜 화정(花庭)으로 가져다 바치라는 뜻을 전했다. 조선 중기 학자 윤휴(尹鑴, 1617~1680) 문집인 『백호전서(白湖全書)』에는 인조 때 이야기로 나오는데 상황이 상세하다.

명령을 들은 이공은 입을 다문 채 한참 있다가 그 사람을 자리로 돌아가게 하고는 마치 주상 앞에 있는 듯한 자세로 꽃송이 아래 앉아서 종을 시켜 파내게 한 다음 가까이 다가가서 혹 뿌리나 줄기 등을 마디마디 다 잘라내고는 역시 아무 말 없이 눈물을 흘리고 흐느끼며 일어났었다. 내시가 돌아가서 보고 들은 대로 아뢰자 주상 역시 한숨만 쉬더라는 것이다.

<『백호전서』 권33>

조선 시대의 인물들에 얽힌 일화를 엮은 책 『대동기문(大東奇聞)』에는 시대적 배경이 효종 시절로 나온다. 이시백이 모란을 잘라버린 이유는 주상께 꽃을 바치면 다른 신하들에게 뇌물로 비칠 수 있기 때문이며, 아예 화근(禍根)을 없애버렸다.

글·사진 이종민

전 언론인·『대구의 나무로 읽는 역사와 생태 인문학』 저자 chunghaman@kore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