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식 제이에스 소아청소년과 원장, 계명의대 명예교수
진료실 창 밖에 있는 플라타너스엔 연록색의 새순들이 햇살을 머금고 저마다 다양한 색상을 자랑하고, 까치집의 까치는 분주히 먹이를 나르면서 새로운 생명을 키우고 있다. 4월은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고 새로운 희망을 가져다 주는 모든 생명이 움트는 계절이지만, 엘리엇의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다."라는 이 문장은 한 세기를 지나 오늘 한국 사회에서도 다시 진실이 되고 있다.
경북 북부의 산불은 초록으로 물들었어야 할 산과 마음을 까맣게 태우고 있다. 우리나라의 정치는 탄핵을 거치며 끝없이 분열되고 있고, 트럼프의 미국과 세계는 다시 벽을 세우고 있다. 여기에 프란치스코 교황의 선종 소식까지 전해지니, 마음의 의지처마저 흔들린다.
하지만 무엇보다 나를 멈춰 세운 것은, 오늘 아침 진료실에 앉아 있던 한 아이의 침묵이었다. 네 살. 말문이 막힌 아이였다. 낯선 얼굴 앞에서 입을 꾹 다문 그 아이는 가정에서는 이야기를 하지만 유치원에만 가면 말문을 닫아 버린다. 또래 아이들이 질문을 쏟아낼 때, 이 아이는 눈만 깜빡이고, 자기가 필요한 것은 언어가 아닌 몸짓으로 모두 해결하는 아이다.
가족 이외의 낯선 사람에게는 말을 하지 않는다. 한참을 기다려도, 아이는 입을 열지 않았다. 나는 갑자기 '사월의 잔인함'이라는 문장을 다시 떠올렸다. 어쩌면 지금 이 사회의 잔인함은, 아이의 말문을 막는 방식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 아닐까.
우리나라의 다문화 가구 수는 40만 가구가 넘고 그 인구는 120만명에 이르며, 다문화 자녀의 수는 30만명이 이른다. 한국어도 서툴고, 엄마의 언어도 채 섞이지 못한 이 아이는, 어느 언어도 완전히 품지 못한 채 '말할 수 없음'이라는 고통 속에 있었다. 언어는 단지 의사소통의 도구가 아니라, 정체성과 존재를 증명하는 방식이다. 말을 잃는다는 것은 곧, 나를 잃는 일이다.
그러나 말문을 닫은 아이는 비단 다문화 가정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요즘 한국 사회에는 조기 영어교육이라는 이름 아래, 정작 한국어를 잃어버리는 아이들이 늘고 있다. 유아기에 영어학원을 다니고, 영어유치원을 졸업했지만, 감정도 생각도 영어로는 표현되지 않는다. 그 아이들은 어른의 기대 속에서 '똑똑한 아이'라는 틀을 쓰지만, 내면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흔들리고 있다.
이런 아이들 중에는 읽기가 느린 아이, 글을 읽고도 이해하지 못하는 아이, 말이 막히는 아이들이 점점 늘고 있다. 언어가 다리 역할을 하지 못할 때, 아이는 세상과 단절된다. 그렇게 생긴 증상이 바로 난독증, 선택적 함묵증, 말더듬증이다.
이 문제는 단지 교육의 방향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그 이면에는 '소통'에 대한 사회의 태도가 있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문화, 침묵을 인내하지 못하는 환경, 기다리지 않는 교육. 이런 사회는 결국, 말할 수 없는 아이를 낳는다.
다문화 가정의 아이에게는 말을 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한국어와 엄마의 언어가 함께 공존할 수 있는 환경. 다름을 문제로 보지 않고, 가능성으로 보는 시선.그 안에서 아이는 마음을 연다.
한국어를 잃고 있는 아이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영어를 잘하게 하기 위한' 조기교육이 아니라, 생각을 말로 표현할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언어환경이 필요하다. 읽기를 억지로 강요하기 전에, 이야기를 듣고 나누는 시간을 만들어야 한다.
엘리엇은 "기억과 욕망이 뒤섞이고, 무기력한 뿌리를 봄비가 흔든다"고 말했다. 말이 막힌 아이들, 말이 어긋난 사회, 그 중심에 우리는 있다. 잔인한 사월, 그 안에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다. 말을 잃은 존재들과 다시 연결되는 일, '소통'을 회복하는 일.그것이 언어발달의 해법이자, 사회 회복의 시작이다. 말이 다시 흐르기 시작할 때, 잔인한 사월도 언젠가 '다정한 봄'으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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