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다리를 절며 가던 길을 내가 가슴을 절며 간 적이 있었다. 내 속처럼 벌겋게 상처 난 기찻길을 덜컹거리는 걸음으로 오간 적이 있었다. 왜관 가는 길이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되돌아보니 그 또한 추억이었고 버릴 수 없는 아픈 경험이었다. 그래도 당시는 백의종군(白衣從軍)으로 변방에 내몰린 장수의 심중인 양 사뭇 비장했다.
지척대는 삶의 끈들을 애면글면 이어 가면서 서로 의지가 되지는 못할망정 기찻길처럼 평행선을 달리며 끝내 아우를 수 없을 것 같은 인연도 있다. 다만 원망스러운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무기력한 자화상이다. 그럴 줄 어찌 알았을까. 고교 은사였던 고 박해수 시인의 '왜관역' 시(詩)를 왜관에서 만나게 될 줄을….
'봄빛 봄밤, 이른 목련꽃, 가등(街燈)과 가등(街燈) 사이, 수백 수천의 맑은 색들이, 백목련꽃처럼 맑다, 새벽 출근길 챙기다, 저녁 퇴근길 돌아오다, 목련꽃 져버리듯, 세속 욕망이 나동그라지고, 삶도 버둥거리다 떨어지는 것… 삶이 가끔 서글퍼지면, 아침저녁 출근길에 생각났던, 그곳, 왜관역… 봄빛 봄밤에 터져나오는 몸부림… 잊지 않으리라, 왜관역 목련꽃 지는 슬픔을, 왜관역 목련꽃 지는 슬픔을…'
왜관(倭館)은 조선시대 왜인들이 통상(通商)하던 장소였다. 그곳에 설치한 행정기관이나 왜인들의 집단 거주지를 이르는 말이기도 했다. 왜관은 부산을 비롯한 해안가나 내륙 지역에도 여러 곳에 설치했으나, 지금까지 이름이 남아 있는 곳은 칠곡 왜관뿐이다. 이 또한 원래는 약목면 관호리에 있었으나 1905년 일제가 경부선 철도를 부설할 때 낙동강 변에 왜관역을 설치하면서 오늘의 읍 소재지가 된 것이다.
'왜관철교'가 상징하듯 왜관은 6·25전쟁기 낙동강 전선 최후의 보루로 전쟁의 상처와 평화의 소망을 품은 곳이다. 일제강점기를 겪으며 불구대천의 원수가 된 일본을 떠올리는 '왜'(倭) 자 지명에 대한 개명 논란도 없지 않았다. 오랜 이름이 무슨 죄인가. 극일(克日)을 하는 첩경은 전투적인 구호보다 내 안의 혁신에 있는 것이다. '더 나은 칠곡'이라는 환경 봉사 단체의 숨은 땅방울로 왜관역이 환골탈태했다고 한다. 이제는 아픈 다리와 시린 가슴을 풀고 목련꽃 피는 왜관역을 만나고 싶다.
joen0406@hanmail.net
댓글 많은 뉴스
국민의힘 "주 4.5일 근무 대선 공약 반영하겠다"
이철우, '선거 명소' 서문시장 방문…TK 지지세 결집 행보
이준석 "대구경북서도 호랑이 될 만한 사람 키워야…尹에게 누가 직언했나"
한동훈, '한덕수 추대론'에 견제구…"출마 부추기는 건 해당 행위"
유승민, 국힘 경선 불출마…"이재명 이길 생각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