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내분' 안팎의 위기…위만조선을 무너뜨리다
범동아시아 '3핵 체제'의 붕괴…조선과 한나라 사이 충돌 발발
1년 이상 계속된 싸움 끝 항복…우리 역사상 첫 '민족적 패배'
사람들은 과거에 있었던 사실, 특히 역사에 대하여 잘 모르거나 오해하는 것들이 많다. 한국사람들은 엄격한 사실의 확인과 규명, 그리고 자기반성과 책임감이 약한 편이다. 역사적인 인식에 소홀한 편이다. 나라가 어떻게 파괴, 붕괴, 또는 멸망했는가에 대해 규명 하는 작업이 부족할 뿐 아니라 관념적이고, 감성적이다. 대전쟁, 자연재앙 등의 처참한 경험이 적은 데다가 나라가 멸망해서 백성들이 다수가 희생되고, 노예로 대거 끌려간 경우가 많지 않은 탓이다. 그나마도 위만조선의 멸망, 백제 멸망, 고구려 멸망, 발해 멸망과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조선의 멸망으로 발생한 디아스포라 상황도 잘 모른다. 한 국가, 한 민족으로서 생존공동체를 유지하는 것의 절박함에 대한 자각이 상대적으로 약하다.
인류역사를 보면 상상할수 조차 없는 집단들이 붕괴(collapse) 또는 멸망(destroy)했다. 조지프 A 테인터는 문명 붕괴에 대한 150여 개 이상의 이론들을 분석하고 난 후, 원인을 크게 11가지의 주제로 설명했다. 그 가운데 화산, 지진, 태풍, 운석의 충돌 등의 천재지변과 외부세력의 침공이라는 대전쟁. 그리고 신분 간, 계급 간, 종족 간, 언어 간, 종교 간, 문화 간의 내부 갈등과 분열이다. 또 하나가 도덕성의 상실이다. '서양의 몰락'을 쓴 슈펭글러,『로마제국흥망사)』를 쓴 에드워드 기본 등도 같은 입장을 갖고 있다. 그만큼 이 부분은 매우 중요하다. 그 밖에도'새로운 시대와 질서에 대한 무지', '대응의지의 상실' 등도 붕괴를 가져오는 요인이다.
◆위만조선은 어떻게 멸망했나
위만조선은 서기 전 2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신흥강대국이 된 한나라와 크게는 동아시아의 역학관계 좁게는 황해 일대의 무역권, 요동지방에 있는 풍부한 자원을 둘러싸고 전쟁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이 전면전에서 위만 조선은 패배했고, 우리는 최초로 민족적 패배를 당했다.
그렇다면 빠른 시간에 성장을 거듭하던 위만조선은 어떻게 멸망했고, 그 결과는 한민족과 동아시아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그리고 그 역사는 21세기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제공할수 있을까?
전쟁에서 패배한 요인들은 일반적인 상황과 주변 자료들을 활용하여 몇 가지를 찾을 수 있다. 첫째, 자연재앙. 둘째, 정치권 내부의 심각한 권력충돌과 내부의 반국가 세력의 활동 및 백성을 비롯한 중간세력들의 향방. 셋째, 군사 동원 능력의 심각한 문제점, 넷째, 산업의 약화와 무역망의 위축 등으로 인한 국가재정의 붕괴. 다섯째, 교통망과 통신망의 약화와 붕괴. 여섯째, 식량 부족과 자원 확보의 어려움. 일곱째, 문화의 오염과 사치와 부패의 만연, 아홉째, 자신감의 상실과 역사동력의 의지 약화 등 다양한 요인이 있다.
위만조선은 일부의 자료에 기록된 동아시아의 국제 정세, 국가 내부의 현상들을 파악하면, 붕괴의 가장 큰 요인은 국제질서의 전면적인 변화이다. 범 동아시아는 북방 유목세력, 중국 세력, 그리고 위만조선을 포함한 만주와 한반도를 포함한 동방세력이라는 3핵 체제로 구성되었다. 지정학적, 지경학적으로 중국 세력과 북방세력은 항상 충돌관계였고, 주로 북방세력이 압박을 가하거나 공격을 했다. 그 시대는 60여년 동안은 중국의 한나라가 흉노에게 종속적인 관계에 있었다. 이러한 역학관계 속에서 동방세력의 중핵인 위만조선은 빠른 시간에 발전할 수 있었다. 그런데 한무제가 등장해서 강대국이 되자 두 나라 간에는 갈등과 충돌이 불가피해졌다.
조한 전쟁(조선과 한나라의 대전쟁)은 위만조선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됐다. 서기전 109년에 한 무제는 섭하(涉何)를 보내어 우거왕을 질책하면서 복속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우거왕은 이에 응하지 않았고, 분노한 섭하는 귀국 길에 국경인 패수(浿水)에서 조선의 관리를 죽였다. 그러자 우거왕은 병력을 발동하여 요동을 공격하고 섭하를 죽이고 전쟁을 개시했다. 그러자 한 무제도 수륙 양면군 5만명을 파견했다. 초기에는 위만조선이 승리했고, 전세를 주도했던 정황도 있다. 전쟁은 1년 이상 계속됐고, 한나라는 결국은 내분을 유도한 끝에 겨우 항복을 받았다.
위만조선은 동아시아의 군사적인 패권을 장악한 한나라와 장기 전면전을 치룰 정도의 국력을 갖고 있었다. 실제로 양마 산업과 군수 산업이 발달했을 뿐만 아니라 무역망을 장악했으며, 주변세력들을 복속시킬 정도로 국력이 강했다. 북한은 고조선이 후기에 들어서면 각종 자원의 확보와 광업 등 산업의 발달이 있었고, 특히 금·은 등의 귀금속을 활발하게 생산했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전쟁의 패배와 나라가 붕괴된 결정적인 원인은 상대적으로 약한 국력 만이 아니다. 기록들과 상황을 근거로 판단하면 지배계층 내부의 분열과 권력 쟁탈전, 국가정체성에 대한 회의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이다.
위만은 연나라 지역에서 들어온 외부 세력으로서 조선의 왕인 '준(準)'을 내쫓고 정권을 장악한 '외세'였다. 따라서 대전쟁을 놓고 조선 내부에서는 분열이 생겼을 가능성이 컸다. 실제로 토착 세력인 상(相)인 로인(路人)과 장군인 왕협(王唊)등은 주화파로서 한나라에 투항할 것을 원했다. 결국 그 세력들은 일부는 남쪽으로 도망갔고, 일부는 한나라에 항복하였다. 한무제는 항복한 대신들에게 벼슬을 주면서 위만조선의 내분을 일으키는데 이용했다. 기원 전 108년에 삼(參)은 우거왕을 죽이고 항복하였다. 하지만 대신인 성기는 저항군을 조직하면서 저항했고, 한 무제는 우거왕의 아들 등을 이용해 성기(成己)를 죽였다. 이러한 사실 등을 고려하면 위만조선은 일방적으로 한나라에 침략을 받고 쉽게 붕괴한 나라가 아니었다. 더구나 붕괴한 후의 영토와 영역, 주민들이'한사군'이라는 틀(frame)로 해석된 정치적인 실체들에게 장기간 지배당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위만조선은 정치 군사적으로 패배했으나 전개된 국제 관계를 보면 한나라 또는 중화문명의 장기적이고 조직적인 지배를 받지 않았다.
고조선 문명권의 중핵 공간은 다른 세력들이 토착세력들의 저항을 받지 않은 채로 장기간 정치적으로 지배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다. 또한 사방에서 외부 문화들이 동시에 일시적으로 진입하여 강제로 이식시킬수 있는 자연환경이나 문화적인 환경이 아니다. 실제로 여러 지역에서 정치세력들이 저항운동을 펼치면서 소국들이 탄생했고, 한나라의 관리체제(郡)들은 빠른 시간에 철수했다.
◆패망한 위만조선이 끼친 한민족의 운명
위만조선이 전쟁에서 패배하고 붕괴된 사실은 한민족의 운명에 어떠한 결과를 가져왔으며, 어떠한 의미를 지녔을까를 살펴본다. 우선 부정적인 측면이 강하다. 첫째, 장기간 존속해온 '조선'이라는 정치체가 멸망했다. 따라서 공간, 주체인 종족들, 산업, 자원, 무역 등의 경제적인 재원과 정치, 외교 등의 국가정책들, 그리고 고유한 문화들을 상실했다. 하지만 직접적인 것은 영토를 상실하고, 활동 영역이 축소된 것이다. 그런데 복잡한 한나라의 내부 사정과 심각한 국제질서는 한사군 등을 통해 위만조선의 영토를 쉽게 경영할 수 없게 했다. 흉노는 아직도 건재했으며, 실크로드 지역에서는 월지·북흉노 등이 무역권을 놓고 갈등을 야기시키는 중이었다. 둘째, 경제적인 손실이 컸다. 곡식이 생산되고, 철·동·주석·황금 등의 지하자원이 풍부한 요동 및 남만주 일대를 빼앗겼다. 한반도 남부와 일본열도까지 이어진 생활권이 붕괴했다. 발해의 근해와 황해북부의 해양, 동해 북부를 상실해서 유기적인 해륙교통망이 균열됐다. 따라서 해양무역과 어업, 만주 지역의 강상교통망이 한계를 드러냈다.
셋째, 민족적인'정체성'의 약화와 종족적인 패배감이 생성됐다. 조선은 느슨하지만 하나의 정치공동체이고, 하나의 문명체였다. 그런데 구심점이 상실되자 주권의 상실, 가치관의 분열, 이산가족의 발생 등 공동체가 파손됐다. 종족적으로 패배의식이 강해지고, 상대적으로 중화의식이 강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고유 문화가 왜곡되고 감추어지는 첫 번째 계기가 됐다. 한자'라는 기호의 적극적인 차용, 중국 화폐의 부분적인 유통, 고도의 논리성과 중화중심적인 유교를 수용하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주변 지역과 선비·오환·퉁구스계 등 방계 종족들이 이탈하면서 독자적으로 성장했고, 훗 날 역으로 우리를 압박하였다.
넷째, 동아시아 세계는 한나라를 중심으로 한'1극 중심'체제로 재편되었다. 조선과 함께 중국세력을 견제하거나 국제관계의 균형을 잡아왔던 흉노 또한 멸망했다. 각 국가와 지역들은 한나라에 의해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교섭을 비자발적으로 관리받게 되었다. 일부 지역에서는 한나라의 식민지 체제가 성립되었다. 이렇게 한나라는 신질서의 중심핵이 되었고, 중화문명의 기본 토대를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동아시아 문화와 문명의 정체현상을 가져왔다.
◆우리 민족사에 끼친 변화
그런데 위만조선의 멸망은 또 다른 측면에서 우리 민족사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첫째, 고조선 문명의 내용과 형식 등이 주변 지역(외방, outsider)으로 확산됐다. 한반도 남부에서도 이미 고인돌 문화, 비파형 청동검과 세형동검, 청동거울 등의 제작과 사용 등의 현상들이 있었다. 그런데 붕괴된 후에는 이러한 현상이 더욱 조직적으로 전파되고 확장됐다. 뿐만 아니라 주민들이 일본열도로 대규모로 조직적으로 진출해서 야요이 후기시대에는 조선 문화의 전파가 가속화됐고, 일본열도는 우리 체제 속에 편입되기 시작했다.
둘째, 조선이라는'정체성'의 자각'과 '소국'들의 탄생이라는 정치질서의 개편이 일어났다. 힘이 강화된 옛 주민들은 한나라의 통제력이 약한 지역을 중심으로 복국운동을 펼쳤다. 진번과 임둔을 몰아내고, 서기전 75년에는 현도군을 몰아낸 후에 이러한 지역들을 중심으로 나라를 세웠다. 초기의 소국들은 모(母)질서이며 선행국가인 고조선을 계승했다는 계승의식을 주장하고, 실천했다. 일종의 생존전략이었고, 건국을 성공시킬 확률이 높은 국가정책의 일환이었다. 물론 이 소국들은 종족·언어·문화 등의 유사성을 갖고, 공동의 역사적인 경험을 보유한 일종의 '역사유기체'였다. 따라서 무의식적이고 암묵적일 수도 있지만 소국들 간의 경쟁과 갈등은 일종의 통일전쟁이고, 조선적 질서의 복원이었다. 그리고 곧 우리역사에 고대국가 시대가 도래했다.(윤명철, <고조선 문명권과 해륙활동>)
문명사적인 대변환, 세계질서의 전면적인 재편, 미 중 러 일이 충돌하는 동아시아 세계, 북한의 핵무장과 위협, 그리고 무엇보다도 6·25 이후 최대로 격화된 사회갈등. 한민족은 위만조선의 패망과 붕괴에서 어떤 교훈을 얻고 실천해야 할까?
역사학자·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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