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고차에 최대한 많이 태워 나가자"…주민들, 합심해서 피해 줄였다

입력 2025-03-30 17:47:11 수정 2025-03-30 17:55:54

"작은 마을…가가호호 사정 잘 알아 화재 대피 제때 가능"
"봉고차·트럭에 마을 사람 싣고 빠져나와"

28일 오후 안동시 임하면 마을 농협이 불에 탄 모습. 정두나 기자
28일 오후 안동시 임하면 마을 농협이 불에 탄 모습. 정두나 기자

경북 안동 산간 마을 주민들이 서로를 챙기며 대피해 인명피해를 막았다. 불길은 예상보다 빠르게 마을까지 번졌지만, 주민들은 차량을 나눠 타고 고령자와 장애인을 함께 피신시켰다. 마을을 가장 잘 아는 이들이 앞장섰고, 소방이 오기 전 공동체가 먼저 움직였다. 불타버린 집과 밭 앞에서도 이들은 마을을 떠나지 않고 복구에 힘을 쏟고 있다.

안동시 일직면 원리 마을 주민들은 지난 25일 불길이 번졌을 당시 소방 당국의 초기 출동이 늦자, 자체적으로 차량을 나눠타고 급히 대피했다. 처음에는 화재가 마을까지 오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지만, 바람의 방향이 갑자기 바뀌며 불길이 순식간에 마을을 향했다.

주민들에 따르면 마을에는 화재 대피 안내 방송이 나왔지만, 고령자나 거동이 불편한 이들이 많아 대피가 쉽지 않았다. 특히 문을 닫고 실내에 머무르거나 귀가 어두운 노인은 외부 상황을 인지하지 못해 위험한 상황에 놓이기도 했다.

박귀자 원리 이장은 "시골 마을이다 보니 어느 집에 누가 사는지 다 알고 있었던 게 큰 도움이 됐다"며 "제가 화물차를 몰고 다니며 어르신들과 장애인을 직접 태워 대피시켰다. 전체 85가구 중 70%가 불에 탔지만, 제때 몸을 피한 덕분에 인명피해는 없었다"고 말했다.

인근 임하면에서도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나서 이웃들의 대피를 도왔다. 이 마을 주민 홍성목(70) 씨는 청송에서 일하던 중 임하면 인근에 산불이 번질 수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의 승합차를 몰아 급히 마을로 향했다. 대부분 고령자인 마을 주민들은 대피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고, 홍 씨는 마을을 돌며 이웃들을 차에 태우기 시작했다.

"6인승 차량에 7명을 태워 좁은 산길을 급하게 내려왔다"며 홍 씨는 "어르신들은 발걸음이 느릴 뿐 아니라 자가용이 없는 경우가 많아 내가 직접 한 분씩 데리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마을에선 산 너머에서 연기가 넘어오는 게 잘 보이지 않아 위험을 감지하기 어려웠고, 대피 준비조차 못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고 했다.

산불 이후에도 비교적 젊은 주민들을 중심으로 자발적인 복구 작업이 이어졌다. 집이 전소됐지만, 밭일과 가축 돌봄 등 일상생활을 이유로 마을을 떠날 수 없는 주민들은 인근 임하면 복지센터에 모여 지내고 있다.

마을 주민 구인석(72) 씨를 포함한 남성 주민들은 구호 물자를 나르고 어르신들의 건강 상태를 수시로 확인하며 공동체를 지탱하고 있다. 구 씨는 "이웃 간 서로 잘 아는 사이이다 보니 어르신들도 경계심 없이 도움을 받고 있다"며 "복지센터가 춥진 않은지, 식사를 거르는 분은 없는지 살피고, 집 상태가 궁금한 어르신들을 대신해 마을에 들어가 사진을 찍어 보여드리기도 한다"고 말했다.

마을 주민들은 당국이 차로 1시간 거리 떨어진 곳에 임시 주택을 마련해주겠다는 제안에도 마을을 떠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 농협과 은행 등 주요 시설이 모두 소실돼 기능을 상실한 마을이지만, 평생을 살아온 삶터를 스스로 복구하겠다는 의지가 강하다.

28일 오후 안동시 일직면 한 도로에서 자동차가 불에 타 형체를 잃은 모습. 김지수 기자
28일 오후 안동시 일직면 한 도로에서 자동차가 불에 타 형체를 잃은 모습. 김지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