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치는 구호품에도 사라진 집에 충격과 허무함
통증 호소 느는데 약은 점점 부족해지는 대피소
길어지는 대피 생활에 피로감 호소, 이재민 맞춤형 지원 필요
경북 북부지역 산불로 삶의 터전을 잃은 이재민들이 길어지는 대피소 생활 속에서 점점 지쳐가고 있다. 쏟아지는 구호품에도 정작 씻을 곳과 옷 등 기본적인 생활 여건이 갖춰지지 않아 불편함은 계속 쌓이고 있다. 대피소를 떠날 기약조차 없는 이재민들은 주거 지원 등 하루빨리 근본적인 해결책이 마련되길 바라고 있다.
◆넘치는 구호품에도 사라진 집에 충격과 허무함
27일 오후 2시쯤 안동체육관에 마련된 산불 피해 이재민 대피소는 길어진 대피 생활로 이재민과 자원봉사자 모두 지친 모습이었다. 대피 기간이 장기화하자 구호 물품보다 실질적인 지원책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날 대피소에 머무는 이재민 수는 약 410명으로 전날보다 100여 명 줄었지만, 각종 구호 물품은 오히려 증가하고 있다. 기존 대한적십자사의 재난구호 급식 차량 외에도 프랜차이즈 치킨업체와 사설업체의 푸드트럭 3대가 추가로 투입됐다.
구호 물품을 실은 화물차들이 끊임없이 드나들면서 물품 보관 창고는 이미 포화 상태다. 안동시청 직원 정모(44) 씨는 "생수나 커피믹스, 물티슈 등 비슷한 물품이 너무 많다"며 "이재민들이 진짜 원하는 건 현금 지원이나 주거지 마련 같은 실질적인 대책이다. 식료품을 준다고 기뻐할 상황이 아니다. 언제까지 이곳에서 지낼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했다.
대피 생활이 길어지면서 이재민들은 점차 망연자실한 상태로 변해가고 있다. 초기에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지만, 전소된 집을 확인한 뒤부터는 절망감에 빠져들었다.
일직면 면직2리에서 평생을 살아온 이태구(85) 씨는 "첫날 얼른 대피하란 소식에 몸만 나왔다. 집이 탈 것이라고는 생각을 못 했는데, 나중에 집이 모두 불탔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말했다. 이웃 주민 A씨 역시 "농사일을 하다 급하게 대피하느라 장화를 신고 나왔는데 며칠째 불편해 오늘 슬리퍼를 샀다"고 했다.
대한적십자사 경북지사 재난심리회복지원센터 상담가 윤모(60) 씨는 "집으로 돌아갈 줄 알았던 이재민들이 집이 전소된 것을 확인하고 큰 충격과 허무함을 느끼고 있다"고 설명했다.
◆통증 호소 느는데 약은 점점 부족해져
세탁이나 목욕 시설 부족으로 이재민들의 생활은 더욱 힘들어지고 있다. 대피소에서 나흘째 생활 중인 김정자(86) 씨는 음식물이 묻은 옷을 갈아입지 못하고 있었다. 김 씨는 "치매가 있는 남편이 '공기가 탁하니 집에 가자'라고 하는데, 집이 없다고 설명해도 이해하지 못하고 계속 조른다"고 했다.
어머니와 함께 사흘째 체육관에서 생활 중인 전명화(51) 씨는 머리를 감느라 다 젖어버린 앞섶을 보여줬다. 전 씨는 "세면대가 낮고 물도 잘 안 나와 어머니가 제대로 씻지 못했다"며 "언제 또 불이 번질지 몰라 불안해 목욕탕에 갈 수도 없다. 불편한 이곳에서 언제까지 머물러야 하는지 답답하다"고 말했다.
안동시보건소 의료지원반에는 전날보다 더 많은 이재민이 진료를 기다리고 있었다. 임시로 제공되는 약품도 제한적이라 이재민들이 불편을 겪고 있다.
이명과 허리 통증으로 평소 복용하던 약을 챙기지 못한 조금희(72) 씨는 "구할 수 있는 약이 한정돼 있어 병원에서 진통제만 받아 겨우 버티고 있다. 보급받은 속옷도 몸에 맞지 않아 입을 수가 없다. 불편한 피난 생활이 점점 길어지는데, 보상이나 추후 대책은 나오지 않아 갑갑하다"고 했다.
안동시보건소 관계자는 "처음보다 두통, 감기를 호소하는 사람이 많아졌고, 대피소 생활이 길어질수록 진료와 약을 타가는 이재민도 늘고 있다. 약을 못 챙겨 나온 어르신들이 많아 약은 늘 부족한 상태"라고 했다.
◆피로감 호소, 이재민 맞춤형 지원 필요
봉사자들도 장기적인 대피소 생활로 피로감을 호소하고 있다. 이번 주 화요일부터 체육관에 머무르고 있는 한 자원봉사자는 "집이 멀어 이곳에서 먹고 자고 있다. 체육관 안으로 들어오는 연기 탓에 이재민을 위한 약까지 먹었다"며 어려움을 토로했다.
현장에선 이재민 상황에 맞는 지원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심리지원 봉사를 하는 최소희(64) 씨는 "집을 잃고 실의에 빠진 이재민들에게 필요한 건 다른 이재민과의 소통이다. 서로 고통을 나누면서 마음을 풀고 있다"며 "그런데 보청기가 없는 어르신들은 소통이 어려워 더욱 고립된다. 긴급하게 보청기를 지원하는 등 맞춤형 지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날부터 한방 진료 봉사를 시작한 한의사들도 이재민과의 소통을 강조했다. 경상북도한의사회 김봉현 회장은 "근골격계 질환과 충격으로 인한 두통, 울화 등을 호소하는 사람이 많다. 진료실을 찾는 분들과 이야기해보면 대화와 상담을 통해 응어리진 마음이 해소되는 경우가 많다. 직접 몸을 만져주고 대화하며 소통하는 봉사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했다.
안동시 관계자는 "잠깐 친인척 집에 가거나 외출을 했다가 돌아오는 분도 있고 해서 인원 파악을 일일이 할 수 없는 상황이다. 직원들도 밤새고 다시 또 아침 7시에 나와 일하고 있어서 피로가 누적되고 있다"며 "삶의 터전을 모두 잃은 이재민들 역시 한껏 예민해진 상태"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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