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본 공상 만화 영화에는 악당이 자주 등장했다. 악당들이 지구를 궤멸(潰滅)시키려고 하지만, 그 일보 직전에 정의의 사도(使徒)가 나타나 그들을 무찌르고 인류를 구한다는 줄거리였다. 그때 그 악당들은 하나같이 무채색의 옷을 걸치고, 날카로운 눈초리에 괴상한 얼굴을 띠고 있었다. 2025년, 붉은 넥타이까지 맨 신사의 외양을 띤 채, 세계를 향해 철권을 휘두르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모습이 묘하게 만화 속의 악당과 겹쳐짐은 무슨 조화일까.
'선한 세력의 승리'라고 묘사된 제2차 세계대전 이래, 자유민주주의라는 가치는 동서 진영 간 이념 대치(對峙)에서 승리하였고, 그 중심에는 미국이 있었다. 자유민주주의가 정의의 사도로서 '선한 세력'을 승계(承繼)한 셈이었다. 미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맹주(盟主)로서, 동시에 세계의 경찰국가로서 자신의 가치를 지키고 확산시키는 데 그 소임을 다해 왔다.
그러나 2025년의 미국은 세계가 정의로 수용해 온 '가치동맹'을 포기하고, 자국 이익에 바탕을 둔 미국 우선주의를 무자비하게 밀어붙이고 있다. 돈이 국가 관계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로 떠오른 것이다. 최근 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으로부터 심한 면박(面駁)을 받고 백악관을 빠져나오던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그늘진 표정에서, '정의'라는 가치가 사라졌음을 보았다. 바이든 정권 때, 그렇게 열렬하게 받았던 환대는 환영(幻影)이었던 것인가? 국제사회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동지도 없음을 여실히 보여 준 대목이다.
트럼프를 향해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를 아무리 설파해도 소용없다. 세계를 분할 지배하게 했던 '1494년의 토르데시야스 조약'처럼, 이미 강대국들은 세계를 지정학적으로 나누어 먹기로 작정한 모양새다. 앞으로 제2, 3의 트럼프가 계속해서 등장할 것이다. 유엔 헌장에 기반한 국제적 질서는 이제 더 이상 신통방통이 아니다. 가치를 부정하고, 돈과 힘을 바탕으로 약소국을 억압하는 새로운 기조가 어쩌면 21세기 인류가 감내해야 할 큰 흐름(트렌드)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흐름은 약육강식(弱肉强食)의 논리가 횡행(橫行)했던 제국주의 시대로 되돌아가는 퇴보의 길이다. 앞으로 약소국은 스스로 국가성을 포기하고 강대국에 의존하거나, '삼전도의 굴욕'을 감내해야 하는 선택의 갈림길에 설지도 모른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냉혹한 국제 정세이다.
이러한 큰 변혁 앞에서, 대한민국은 정반대로 나아가고 있는 듯하다. 대한민국의 에너지를 온통 엉뚱한 곳에 쏟고 있다. 대한민국을 이끌 선장은 직무 정지 상태이고, 정치권은 대권 경쟁에만 몰두해 있고, 헌법재판소와 사법부는 신뢰(信賴)를 잃고 있다. 게다가 국민은 대통령 탄핵의 찬반으로 인해 극심히 쪼개져 있다. 특히 대통령 탄핵심판 선고일이 다가오면서, 찬반 어느 경우든 그 후유증은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다. 나라 전체가 송두리째 가라앉고 있는 것이다.
진화된 악당이 판치는 국제 정세에서, 자유대한민국은 어떤 길로 가야 할까? 작금의 혼란과 분열을 악몽에서 깨어나듯 없었던 것으로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최소한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 되어서는 안 된다. 대권 싸움도 중요하다. 그러나 자유대한민국의 존립과 번영(繁榮)을 유지하라는 것은 주권자의 절대적 명령이다. 자유대한민국을 지키지 못하면 우리는 모든 것을 잃는다. 그래서 자유대한민국 수호가 우선인 것이다.
이용호 영남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댓글 많은 뉴스
[정진호의 매일내일(每日來日)] 3·1절에 돌아보는 극우 기독교 출현 연대기
김세환 "아들 잘 부탁"…선관위, 면접위원까지 교체했다
尹공약 '금호강 르네상스' 국비 확보 빨간불…2029년 완공 차질 불가피
野, '줄탄핵'으로 이득보나…장동혁 "친야성향 변호사 일감 의심, 혈세 4.6억 사용"
崔 대행 "헌재 선고 앞두고 충돌 우려…폭력집회 관용 없이 엄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