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라언덕-유광준] 정치의 품격

입력 2025-03-06 17:30:00 수정 2025-03-06 19:15:07

유광준 서울취재본부 차장  

유광준 서울취재본부 차장
유광준 서울취재본부 차장

"대부님, 그게 아니라 명분이 없다 아입니까, 명분이! 건달 세계에도 룰(Rule·규칙)이라는 게 있는데. 주먹으로 하면 내가 백번도 이기지만."

천만 영화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에 등장하는 대사다.

극 중 최익현(최민식)이 깡패 두목 최형배(하정우)에게 나이트클럽을 빼앗아 오기 위해 김판호와의 전쟁을 하자고 했을 때 최형배가 난감해하며 내뱉은 말이다.

'명분'(名分·cause)은 어떤 일을 꾀하면서 내세우는 표면적인 정당성이나 이유를 뜻한다. 구체적으로 어떤 행동이나 주장, 결정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근거다.

주로 사회적, 도덕적, 정치적 맥락에서 사용된다. 특정 행동이 왜 필요한지 또는 그 행동이 타당하다는 것을 설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아득해진 낭만의 시대 이야기지만 그 시절에는 동네 건달조차 자신의 운신(運身)에 의미를 부여했다.

아쉽게도 현재 대한민국 정치인들은 영화 속 조직폭력배 우두머리의 처신만도 못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극단의 대결 정치와 안하무인격 진영 논리로 점철된 한국 정치가 끝 모를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기 때문이다.

거대 야당의 실력 행사((實力行事)에 현직 대통령이 비상계엄 선포로 응수하는 정치가 대한민국의 현주소다. 강 대 강의 충돌만 이어진다.

나라의 미래는 안중에도 없고 정권 흔들기에만 골몰한 야당도 문제지만 야당을 국정 파트너로 인정하고 타협이나 협상을 통해 정국을 풀어나가기보다 무려 '서기 2024년도'에 비상계엄 선포 카드를 꺼내 든 현직 대통령의 무모함에는 서글픔까지 느껴진다.

위정자가 주권자에게 보여야 할 최소한의 예의인 명분은 온데간데없고 우리 편만 의식한 우격다짐과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 판을 친다.

거대 야당이 국정 견제의 명분으로 내세운 '총선 민심'에 '묻지마식 줄탄핵'과 '정부 예산안 일방 처리는 없었다' '계몽령'이라는 단어에 고개를 끄덕일 양식 있는 국민이 몇 명이나 될까!

명분 없는 정치는 모리배(謀利輩)의 힘자랑에 불과하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93년 8월 12일 저녁 대국민특별담화를 통해 "금융실명제를 실시합니다"라고 전격 발표하고 '비실명계좌와 실명 확인 없는 현금 인출을 금지한다'는 내용의 긴급재정명령안을 시행했다. 느닷없었지만 금융실명제 실시 명분에 동의했기에 국민들은 박수를 쳤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정치인은 상인(商人)적 현실 감각과 서생(書生)적 문제의식을 함께 갖춰야 한다"고 당부했다. 명분과 실리의 조화를 꾀하는 고도의 정교한 작업이 정치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김종필 전 국무총리는 "정치는 단념의 기술이다. 정치란 해야 할 일은 어김없이 해내고, 해서는 안 될 일은 단념하는 기술이다"고 강조했다. 명분 있는 일에 과감하고 명분 없는 일은 쳐다보지도 말라는 조언이다.

미국에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가 들어섰다.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우며 전 세계를 무대로 분탕질이 한창이다.

'민주주의 전도사' '세계의 경찰 국가' '인권 수호자' '세계 민주주의의 모범'이라고 칭송받던 미국이 트럼프 대통령의 선거 구호였던 '마가(MAGA·Make America Great Again·미국을 다시 위대하게)'에 홀려 체면(體面)을 내려놨다.

이에 자유주의 국가 진영에 비상이 걸렸다. 동맹과 우방 관계도 흔들리고 있다. 명분 없는 (국제)정치는 약자를 힘들게 한다. 정치가 품격을 회복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