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지의 조선후기 당쟁사] 숙종-서인은 왜 분열했나?

입력 2025-03-04 04:30:00

'남인에 대한 태도' 두고 서인 내분…강경파-온건파로 갈라져
조선 후기 붕당은 '서인의 분열 과정'…숙종, 집권 세력 교체 통해 왕권 강화
정권 잡은 서인, 남인 축출 공작 정치…젊은 선비 주축으로 비판 여론 형성
적대적 '노론'과 관용적 '소론' 나뉘어

노론의 정신적 지주 송시열, 숙종 15년(1689) 기사환국때 사사당했다.
노론의 정신적 지주 송시열, 숙종 15년(1689) 기사환국때 사사당했다.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의 작은 오빠 민진원이 쓴 단암만록.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의 작은 오빠 민진원이 쓴 단암만록.

숙종 이후 조선후기 당쟁은 서인들의 분열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서인이 분열하는 주된 요인은 '남인에 대한 태도'였다. 정치사에서 각 당파가 갈라지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주로 '어떤 사안에 대한 온도 차이' 때문이다. 즉, 각 당파의 분열은 '태도에 있어서 관용없는 강경함'과 '속도에 있어서 즉각적인 추진'을 추구하는 '적대적 강경파'와 그에 비해 '태도에 있어서 포용적 관용'과 '속도에 있어서 절차적 추진'을 추구하는 '관용적 온건파'로 분열된다는 것이다.

조선 붕당정치에서 남인이 나타난 것도 동인의 '서인'에 대한 이러한 '온도차이' 때문이었다. 동인은 '서인에 대한 강경한 복수를 주장한 북인'과 '서인에 대한 온건한 협력적 태도'를 가진 '남인'으로 분열되었다. 선조 24년(1591) 왕세자 책봉을 둘러싸고 동인과 서인이 대립하다가 정철로 대표되는 서인이 몰락는데, 그 서인들에 대한 관대한 태도를 추구하던 세력이 류성룡을 중심으로 하는 '남인'이었다. 이후 남인은 서인이 일으키는 '인조반정'에 함께 참여했다.

그런데 이제 '인조반정'을 남인과 함께 했던 서인 내에서 남인에 대한 온도 차이가 나타났다. 이번에는 서인 내에서 남인에 대한 적대적 강경파인 노론 과 관용적 온건파인 소론으로 분열되었다.

◆공작정치 임술고변(壬戌告變)

애초에 인조반정을 주도한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진 것은 숙종 8년(1682)에 일어난 임술고변 때문이었다. 현종 15년(1674)에 현종이 사망하고 14세였던 숙종이 즉위했을 때 정권은 남인에게 있었다. 남인정권이 서인에게 넘어간 사건은 숙종 6년(1680)에 일어났는데 이것을 '경신환국'(庚申換局)이라고 한다. '환국'(換局)이란 정권이 바뀌었다는 뜻으로, 조선 후기에 집권 세력이 바뀌는 사건을 이르는 말이다. 숙종은 상대 정파로 정권을 급격하게 바꾸는 방법을 최대한 활용하여 왕권 강화를 도모했던 왕이다.

숙종 6년 경신환국으로 남인을 축출하고 정권을 잡은 서인은 남인의 정치적 재기를 아예 불가능하게 만들기 위한 공작정치에 몰입했다. 남인 허새(許璽)와 허영(許瑛)을 중심으로 남인 중신 민암(閔黯) 등이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고변이 숙종 8년의 임술고변이다.

임술고변은 숙종의 외삼촌 김석주(金錫胄)와 김석주의 심복(心腹) 김익훈(金益勳)과 김환(金煥)이 만들어낸 공작정치였다. 국청이 설치되고 관련자들을 국문하는 과정에서 김석주의 사주를 받은 김익훈의 공작정치 정황이 드러났다.

무고라는 것이 점점 확실해지자 서인 내부에서 남인을 향한 도를 넘은 행위라는 비판이 일어났다. 주로 젊은 선비들을 주축으로 비판 여론들이 형성되었다. 서인의 대로(大老)라고 불리는 국가 원로 송시열(宋時烈) 역시 임술고변의 정국을 피해갈 수 없었다. 여러 차례 숙종의 부름을 거절하며 낙향해 있었던 송시열이 이 시기에 상경했다.

서인 내에서 남인을 향한 과도한 공작정치를 비판했던 젊은 선비들은 서인의 정신적 지주인 송시열이 무고를 주도한 김익훈에 대한 처벌을 숙종에게 주청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송시열이 숙종에게 고한 말은 젊은 서인들의 기대와는 달랐다. 김익훈의 처분에 대해 숙종이 묻자 송시열의 대답은 이랬다.

"김장생은 신의 스승이옵고, 김익훈은 김장생의 손자입니다. 신이 김익훈을 잘 선도하지 못하여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신의 죄이옵니다. 통촉하여 주소서."

송시열의 대답으로 상황은 종결되었다. 송시열이 숙종의 외삼촌인 김석주의 손을 들어주는 것으로 사실상 서인은 숙종의 척신(戚臣·왕의 외가 또는 왕비의 친인척으로 왕과 성이 다른 혼인으로 만들어진 인척관계의 신하)편과 비(반)척신편으로 갈라졌다.

척신편은 송시열을 비롯해서 김석주, 김익훈 등 조정과 서인내부에서 서열이 높고 연배가 높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에 노론(老論)이라고 불렀다. 그에 비해 비(반)척신편으로 상대적으로 연배가 낮은 젊은 사람들을 소론(小論)이라고 불렀다. 소론은 노론에 비해 남인에 대해 온건적이고 포용적이었다.

다시 서인에서 남인으로의 전격적인 정권 교체는 숙종 15년(1689)에 일어나는데 '기사환국'(己巳換局)이라고 한다. 기사환국은 오랫동안 후사를 보지 못했던 숙종이 후궁 희빈(禧嬪) 장씨(張氏)로부터 첫 아들을 얻으면서 일어난 정권 교체이다. 숙종은 갓 태어난 아들(후일 경종)을 원자로 책봉하는 것을 반대하는 세력들을 일거에 정권에서 내쫓았다. 또한, 왕비 민씨를 폐서인시키고 희빈 장씨를 왕비로 봉했다. 그리고 정권을 서인에서 희빈 장씨를 후원하는 남인으로 바꾼 것이다.

그런데 숙종의 환국정치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기사환국 이후 만약 더 이상의 정권 교체가 없었거나 아니면 다른 방식의 타협적 정치 행태가 자리잡았다면 이후 '사도세자의 비극'은 어쩌면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숙종의 환국정치 후유증은 대를 이어 두고두고 복수에 복수를 불러일으키는 이른바 보복정치의 출발점이 되고 있었다.

◆영조의 모친인 숙빈(淑嬪) 최씨(崔氏)의 활약

숙종 20년(1694) 갑술환국으로 축출되었던 서인이 다시 돌아오고, 폐서인 되었던 민씨가 다시 중전으로 복권되었다.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정권을 다시 잡게 된 것에는 나인 출신으로 숙종의 후궁이 된, 후일 영조의 모친인 숙빈(淑嬪) 최씨(崔氏)의 공이 컸다. 폐서인 되었다가 갑술환국에 복위된 인현왕후 민씨의 작은 오빠였던 민진원(閔鎭遠)은 그가 저술한 '단암만록'(丹巖漫錄)에 숙빈 최씨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숙종의 유모 봉보부인이 인경왕후(숙종의 첫 번째 왕비로 숙종 6년에 사망, 김춘택의 고모) 본가와 친밀하여 갑술년 환국 당시에…김춘택이 봉보부인을 통해 최씨와 계략을 세워 남인의 정상을 주상에게 자세히 보고하여 이번 환국이 이루어졌다고 하였다. 이 때문에 남인과 소론에서는 숙빈을 가리켜 김가(金家)의 사인(私人)이라고 하였다.'

'김가의 사인(私人)'이라고 세간에서 불렸던 사람, 영조의 모친 숙빈 최씨의 신분은 영조에게 죽을 때까지 지울수 없는 두 개의 주홍글씨 중의 하나였다. 그런데 영조가 모친 이야기를 하는 것을 암묵적 금기로 만든 것은 모친의 미천한 출신 때문이 아니다. 민진원이 '김가의 사인(私人)'이라고 대놓고 쓴 것처럼, 숙빈 최씨와 김춘택(숙종의 첫 번째 왕비 인경왕후의 조카)의 관계가 모친의 출신 신분보다 더 정치적으로 중요하고 민감한 사안이었기 때문이다. 숙빈 최씨를 궁으로 보내 숙종을 만나도록 계획한 사람이 김춘택이었다. 그리고 갑술환국은 기획 각본 감독이었던 김춘택이 주연배우에 숙빈 최씨를 기용한 작품이었다. 갑술환국 당시 숙원이었던 최씨는 그 해에 후일 영조로 즉위하는 연잉군을 출산했고, 곧 숙의로 승진했다.

갑술환국으로 복귀한 인현왕후 민씨는 7년 뒤인 숙종 27년(1701)에 사망한다. 숙종실록 숙종 27년 9월 23일자 기사는 희빈 장씨가 왕비를 저주하는 '무고'(巫蠱-무술(巫術)로 남을 저주함)를 했다고 숙빈 최씨가 숙종에게 고했다는 내용을 전하고 있다.

숙종은 숙종 27년 10월 8일 희빈 장씨에게 자진을 명했다. 당시 14세였던 왕세자(경종)는 숙종에게 어머니를 살려달라고 간청했다. 나중에는 지나가는 신하들의 옷자락을 붙들고 울면서 하소연했다. 왕세자의 입장을 생각해야 한다는 영의정 최석정(崔錫鼎)이 희빈 장씨를 사형시키는 것에 반대하는 입장을 숙종에게 고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희빈 장씨는 결국 사사당했고, 그 오빠 장희재는 복주(伏誅) 된 후에 사지가 찢겨 돼지와 개가 다투어 먹도록했다. 당시 왕세자는 14세였고, 숙빈 최씨의 아들 연잉군은 8세였다.

이로써 경종과 영조의 평행선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 되었다. 당시 왕세자의 처지에 적대적이었던 세력과 동정적이었던 세력들도 타협없는 평행선 위에 놓이게 되었다.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