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석 전 방송통신심의위원
지난해 말 윤석열 대통령 탄핵 심판이 개시될 때쯤이었다. 헌법학자인 한 선배로부터 콘라드 헤세(Konrad Hesse·1919~2005) 전 독일 연방헌법재판소 재판관에 대해 들었다.
독일 헌법재판소 '설립의 아버지' 중 한 명인 그는 명쾌한 판결과 탁월할 법 논리로 명성을 날렸는데, 은퇴한 뒤 제자들이 물었다. "그동안 보여 주신 탁월한 법 논리의 비결이 뭡니까?" 대답이 의외였단다. "대부분 사건을 보자마자 직감으로 바로 결론 내고, 심의는 법 논리를 세우는 과정"이라고 했단다. 그런데도 12년 재직 기간 동안 불공정 시비나 논리가 빈약하다는 비판을 받지 않았단다.
필자가 "어떻게 그게 가능하냐"고 물으니 "그럴 만한 자질이 되는 사람을 뽑을 수밖에 없는 시스템과 문화 때문"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독일은 총 16명의 재판관을 상·하원에서 각각 8명씩 선출하는데, 상·하원 모두 3분의 2 이상의 찬성을 얻어야 하기 때문에 흠결이 있거나 극단적인 사람은 원천적으로 재판관이 될 수 없고, '12년 단임제'이기 때문에 눈치 안 보고 소신껏 판결을 할 수 있는 구조라고 했다.
우리나라 헌재는 1987년 헌법 개정을 계기로 독일 연방헌재를 모델로 탄생했다. 독일과 마찬가지로 우리 헌재도 일반 법원보다 '직관'과 '가치 판단'이 중시된다. 상위법도 없고, 판례도 제한적이기 때문에 중요 사안에 대해서 새로운 가치 판단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떤 가치인가'다. 독일 재판관들은 판단의 기준으로 '헌법 정신'을 가장 중시한다. 하지만 우리는 많은 경우 재판관 개인의 '정치적 소신'이 우선적인 판결 기준이 되는 것 같다. 헌재 재판에서 '헌법'은 사라지고 '개인적 소신'만 남는 기현상이 벌어지는 것이다.
요즘 우리 헌재 관련 논란이 점입가경이다. 어이없게도 대통령 탄핵 심판에서 국회 의결로 합의한 핵심 내용인 '내란죄'를 빼고 탄핵안이 제출되었음에도 심의는 그대로 진행되고 있다. 지난 방송통신위원장 탄핵 심판에서 보여준 '진영 심판'은 의구심을 확신으로 바꾸는 사건이었다. 임명 단 이틀 만에 탄핵소추된 방송통신위원장에 대해 헌재는 174일간 결론을 미루다가 결국 기각 결정을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만장일치가 아니고 인용과 기각이 '4대 4'로 나뉘었다.
심의 과정에서 문형배 헌재소장 권한대행은 "국회가 방통위원을 추천하지 않은 것도 법률 위반 아니냐"고 소추인인 국회 법사위 측에 대해 준엄하게 일갈했지만 그냥 말뿐이었다. 재판관 개인 결정으로는 설득력 있는 법리도 제시하지 못한 채 탄핵안을 인용했다. 당시 그는 "정치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법률을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했지만, 결국 '법률이 아니라 정치로 판결한 것' 아닌가? 또 마은혁 헌법재판관 후보자 관련 권한쟁의에 대한 선고 연기는 스스로 국민적 불신의 불꽃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이게 대한민국 최고 헌법기관의 민낯이다.
'대통령 탄핵 심판'이라는 국가적 중대사에 피고인 대통령이 아닌 헌재 재판관들이 이슈가 되는 이례적인 일이 계속 벌어지고 있다. 헌재와 관련된 논란은 '한 정권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존망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 심각성은 다른 뉴스들과는 완전히 격이 다르다. 정권이 바뀔 수 있고 탄핵 절차로 한 정권을 바꿔본 적도 있지만, 최후의 심판 헌재가 국민의 신뢰를 잃으면 그 나라는 존립하기 힘들다. '민란 우려'라는 극단적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강성한 나라는 어느 곳이나 제복에 대한 존중이 있다. 미국이 아무리 혼란스러워도 제복의 권위는 여전히 높다. 국민은 마음으로부터 존중과 존경을 표한다. 불량 국가 북한도 보위부 제복이 지탱하는 나라다. 당과 나라, 모두가 타락해도 보위부가 중심을 잡고 있으니 그나마 국가 행세를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제복은 어떤가? 의사들은 제복을 반납하고 파업에 들어가 풀지 않고 있다. 군인 아저씨들은 억지 눈물과 보신주의로 응석받이가 되고 말았다. 판사님들은 재판 지연과 온탕냉탕 엇갈린 재판으로 국민 신뢰를 상실했다. 이제 마지막 보루인 헌재까지 이 모양이니 국민 심려가 클 수밖에 없다.
이제라도 '법복의 무게'를 각성하여 신중하고 불편부당(不偏不黨)한 재판을 해 주기 바란다. 그렇지 않으면 재판관 개인뿐 아니라 개헌을 재촉해 '헌재의 존립'도 위태롭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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