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숙의 옛그림 예찬] <283>까마득한 요순시절 두 친구 이야기

입력 2025-01-30 09:25:01

미술사 연구자

진재해(1691-1769),
진재해(1691-1769), '소보세영(巢父洗潁)', 종이에 채색, 33.5×29.4㎝, 일본 야마토분가칸(大和文華館) 소장

화면 왼쪽 위의 어렴풋한 글자는 '소보세영'으로 짐작된다. 세상을 피해 산야에 묻혀 사는 은자(隱者)의 원조인 소보(巢父)와 허유(許由) 이야기다. '아버지 부(父)'가 어른의 경칭으로 쓰일 때는 '보'로 읽는다. 소는 '새집 소(巢)'다. 이 둘을 소허巢許), 소유(巢由)라고 한다. 형제인 백이숙제처럼 항상 나란히 함께 나오는 까마득한 요순시절의 두 친구다.

요임금은 나이가 들자 왕위를 물려줄 후계자를 물색했다. 아들이 있긴 했지만 왕이 될 재목이 못 된다고 판단하고 천하(天下)를 다스릴만한 인물을 찾은 것이다. 허유가 적임자라고들 했다. 요임금은 허유에게 왕위를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허유는 뱁새가 넓은 숲에 살아도 둥지를 틀 나뭇가지 하나면 충분하고, 두더지가 황하에서 물을 마신다 해도 제 배만 채우면 그만이듯 나에게는 천하가 필요 없다고 거절한다('장자'의 '소요유'편에 나옴). 요임금은 다시 구주(九州)라도 맡아달라고 간청했지만 이번에도 거절당한다.

허유는 이런 말을 들은 자신의 귀가 더럽혀졌다며 냇가에 가서 귀를 씻었다. 소보가 소에게 물을 먹이려 왔다가 왜 귀를 씻고 있는지 물어보았다. 사연을 듣자 소보는 "이름이 알려지다니 내 친구가 아니다."라며 절교를 선언한다. 허유는 슬퍼서 어쩔 줄 몰랐다. 소보는 허유가 귀를 씻어 더럽혀진 물을 내 소에게 먹일 수 없다며 소를 끌고 상류로 올라가 물을 먹였다. 집조차 제대로 짓지 않아 그저 '새둥지 같은 집에 사는 어른'으로 불린 소보는 진정한 은자였다.

영조 때 화원화가 진재해가 그린 '소보세영'은 허유가 물가 언덕에 앉아 귀를 씻고 있고 소보가 소를 타고 다른 곳으로 가는 장면이다. 조선 후기 왕실에서 어린 왕세자를 교육시키기 위해 만들었던 일종의 동화책인 '예원합진(藝苑合珍)'에 실려 있다.

이 두 친구 이야기는 '고사전(高士傳)'. '세설신어(世說新語)', '사문유취(事文類聚)' 등 중국의 여러 책에 나온다. 실화일까? 이런 의심이 들기도 하겠지만 이보다 먼저 요즘 사람이라면 상상하기도 어려운, 지어낼 수조차 없는 이야기라는 생각이 든다. 이 냇물이 영천(潁川) 또는 영수(潁水)이고 이들이 숨어 살던 곳이 기산(箕山)이다. 귀를 씻는다는 세이(洗耳)는 몸의 청결인 세면(洗面), 세수(洗手), 세족(洗足)과는 다른 차원의 언어다.

유교의 이상은 높고도 높았다. 조선의 많은 선비들이 이런 삶을 살려고 노력했다. 이렇게 높은 곳을 가리켰기 때문에 유교국가 조선의 문화 전반에 서린 고결함은 말로 형용하기 쉽지 않다. 더구나 옛사람들은 그런 마음을 입 밖으로 드러내지도 않았다. 이름이나 성씨조차 알 수 없는 소보처럼. 그러나 너무 높은 곳을 가리켰으므로 허위의식을 비롯해 부작용도 많았다.

미술사 연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