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당시대 고구려의 서쪽 경계 북경 남쪽의 역수 유역"
'통전' 평주에 안동도호부 설치…"백이, 숙제 고죽국 있던 지역"
북위시대부터 수, 당시대까지 고구려 수도 줄곧 하북성 평주
"탁군의 동쪽은 고구려의 영역 역수와 탁군까지 중국의 영토"
◆수·당시대 고구려 수도는 발해 연안에 있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은 북한의 대동강 유역에 줄곧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수, 당시대에 고구려의 수도는 대동강 유역에 있지 않고 발해 연안에 있었다. 그것을 객관적인 사료를 가지고 증명할 방법이 있는가.
두우(杜佑·735~812)는 당나라에서 재상을 역임한 당나라의 대표적인 문신이자 역사학자이다. 그는 36년의 노력을 기울인 끝에 200권에 달하는 방대한 역사학 명저 '통전(通典)'이란 책을 완성했는데 여기에 평생정력을 받쳤다고 만년에 술회했다.
두우는 수, 당과 고구려의 전쟁이 있은 약간 뒤에 태어났으므로 전쟁에 직접 참여하진 못했지만 현장을 목격한 사람들의 증언을 듣는 일은 가능했다. 그런 점에서 그의 저서 '통전'은 수, 당시대 고구려사를 연구하는데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
'통전'의 안동도호부 조항에서는 "춘추전국시대에는 연나라 지역이고 진(秦)나라 한나라시대에는 요동군 지역이며 진(晉)나라 때는 거기에 평주를 설치했고 후위 즉 북위시대에는 고구려가 평주에 도읍했고 당나라 때는 안동도호부를 설치했다.(春秋及戰國 並屬燕 秦二漢曰遼東郡 東通樂浪 晉因之 兼置平州 後魏時 高麗國都其地 大唐置安東都護府)"라고 하였다.
'통전' 평주 조항을 살펴보면 안동도호부가 설치된 평주는 두우시대에는 지금의 하북성 노룡현을 주청사 소재지로 하였으며 옛 백이, 숙제의 나라 고죽국이 있던 지역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지금의 하북성 노룡현 옛 백이, 숙제의 나라가 있던 지역에 북위시대에 고구려가 도읍했고 당나라때는 안동도호부를 설치했다고 당나라시대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역사학자인 두우가 '통전'을 통해서 밝힌 것은 그 의미가 매우 깊다.
이는 당나라에 의해 안동동호부가 설치되기 이전인 위진남북조시대에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이 하북성 평주에 있었다는 근거가 되는 데 그것이 과연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을까.
그 시기에 중원의 한족은 세력이 약화되어 장강 이남으로 쫓겨가고 선비족이 중원에 들어가 낙양에 북위를 세웠다. 동북방의 강대국 고구려는 광개토태왕이 출현하여 한사군을 몰아내고 발해만 일대 고조선의 고토를 모조리 회복하였다.
그러므로 장수왕의 평양 천도는 고조선의 고토를 회복하여 옛 고조선의 수도 평양성 즉 하북성 노룡현 일대 평주로 수도를 옮겼던 것이며 대동강 유역 평양으로 천도한 것이 아니었다.
북위시대부터 수, 당시대까지 고구려의 수도는 줄곧 하북성 평주에 있었다. 그러다가 당 고종시기에 나당연합군의 남북협공에 의해 하북성 평주에 있던 고구려의 평양성이 함락되고 이곳에 당나라의 행정기구인 안동도호부가 설치되자 고구려는 동쪽으로 이동하여 대동강 유역 평양에 둥지를 틀게 된 것이다.
그것을 뒷받침하는 기록은 송나라 때 학자 왕응린(1233~1296)이 쓴 '통감지리통석'의 진(晉) 19주 조항에도 다음과 같이 보인다. "평주는 창려현을 치소로 하였다. 한나라의 요서군 교려현 지역이고 당나라 때는 안동도호부가 설치된 곳이다.(平治昌黎 漢遼西交黎 唐安東府)"
고구려의 평양성을 함락시키고 당나라의 안동도호부가 설치된 창려현은 현재는 중국 하북성 진황도시 관할이다. 전 중국에서 풍광이 가장 수려한 하북성 동북부 발해만의 해변에 송나라때까지 고조선의 성이 남아 있었던 노룡현과 이웃해 있다.
당 두우의 '통전'과 송나라 왕응린의 저서 '통감지리통석'의 기록을 종합해본다면 수, 당시대에 고구려의 수도가 현재의 발해 연안 진황도시 창려현, 노룡현 일대에 있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하겠다.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 탁군(涿郡)에 집결한 수나라 군대
수, 당시대에 고구려의 주요 활동무대가 발해 연안이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문헌적 근거는 여러군데서 찾을 수 있다. 예컨대 수양제는 612년 첫 번째 고구려 공격에 나설 때 "전군을 탁군에 집결시켰다.(大軍集于涿郡)"
613년 제2차 고구려 정벌 때도 "천하의 병사를 징집하여 탁군에 모이도록 했고(徵天下兵 集于涿郡)" 614년 제3차 정벌 때 역시 수양제는 "탁군으로 행차했다.(行幸涿郡)" 이는 모두 '수서(隋書)'의 수양제본기에서 확인이 가능한 내용들이다.
◆수군이 집결한 탁군은 오늘날의 어디인가
탁군은 중국 고대의 행정구역 명칭이다. 시대에 따라서 그 관할 범위에 약간의 변동이 있었지만 지금의 하북성 북경시 남쪽 탁주시(涿州市) 부근인 것은 분명하다.
서기전 202년 한고조 유방은 광양군 남부, 거록군 북부, 항산군 일부를 분할하여 탁군을 설치했다. 이때 탁군은 21개 현과 7개의 후국(侯國)을 관할하였다.
그 지역은 대체로 지금의 북경시 방산구 이남, 하북성 역현, 청원현 이동, 안평현, 하간시 이북, 패주시, 임구시 이서 지역에 해당한다. 그런데 수나라 때 탁군을 폐지하고 유주에 귀속시켰다가 다시 유주를 탁군에 귀속시켰고 당나라 때는 또 탁군을 유주로 환원시켰다.
수, 당시대의 탁군은 위치상에서 유방이 설치한 탁군과 약간의 변동이 있었다. 지금의 하북성 패주시, 천진시 해하(海河) 이북, 계운하(薊運河) 이서, 적성현, 탁록현 이동 지역 등이 수, 당시대 탁군의 관할지역이라고 중국학계에서는 추정한다.
수양제가 고구려를 공격할 때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이 만일 한반도 대동강 유역에 있었고 수나라와 고구려의 국경선이 현재 요녕성의 요하였다면 고구려를 치기 위한 수군은 요녕성의 요하 서쪽에 집결하는 것이 합당하다.
그런데 수군은 왜 고구려의 서쪽 경계인 요하 유역에서 수천 리 떨어진 하북성 북경시 남쪽의 탁군에 집결했을까. 그것은 상식적으로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수군은 왜 북경시 남쪽의 탁군에 집결했는가
현재의 중국 지도상에서 살펴보면 수, 당시대의 탁군이 있던 지역은 북경시 남쪽에 위치하여 그 행정구역이 하북성 보정시 부근이다. 탁군의 관할이었던 임구시, 청원현, 하간시, 안평현 등은 현재의 중국지도 상에서 하북성 보정시 남쪽에서 보이는 지명들이다.
수양제, 당태종이 고구려를 정벌할 때 내세운 구호가 "요수와 갈석산에 가서 죄를 묻겠다(問罪遼碣)"는 것이었다. '사고전서'에 의하면 요수와 갈석산은 고조선의 서쪽 경계로서 지금의 하북성 보정시 역수와 백석산으로 고증된다.
그러니까 고조선의 서쪽 경계이자 고구려의 서쪽 경계인 하북성 보정시의 역수와 백석산 남쪽에 수, 당시대 중국의 행정구역인 탁군이 설치되어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고구려를 치러가던 수나라 군대가 왜 탁군에서 집결했는지 그 이유가 분명해진다고 본다. 즉 탁군 동쪽은 고구려의 영역이었고 하북성 보정시 역수와 백석산 남쪽에 설치한 탁군까지가 중국의 영토였다. 그래서 수군은 역수와 백석산을 경계로 고구려와 국경을 마주한 탁군에 총집결했던 것이다.
◆수군의 탁군 집결은 탁군에서 고구려와 국경을 마주했다는 증거
'삼국사기' 영양왕조와 '수서' 양제기의 기록에 의하면 수군은 612년 봄 정월 신사일에 전군이 탁군에 집결했고 그 다음 날인 임오일에 수양제는 조서를 내려 다음과 같이 말했다.
"좌측 제1군은 루방, 제2군은 장잠, 제3군은 해명, 제4군은 개마, 제5군은 건안, 제6군은 남소, 제7군은 요동, 제8군은 현도, 제9군은 부여, 제10군은 조선, 제11군은 옥저, 제12군은 낙랑의 길로 진군하고 우측 제1군은 점제, 제2군은 함자, 제3군은 혼미, 제4군은 임둔, 제5군은 후성, 제6군은 제해, 제7군은 답돈, 제8군은 숙신, 제9군은 갈석, 제10군은 동이, 제11군은 대방, 제12군은 양평의 길로 진군하되 서로 긴밀히 연락하여 평양에 총집결하라."
113만 대군을 좌12군, 우12군으로 나누어 이들 군대가 경유할 각 방면의 지역을 지정해준 다음 "평양을 최종 집결지(總集平壤)"로 삼은 것이다.
그동안 한, 중 학계는 수나라 군대의 총집결지 평양성을 대동강 유역으로 보았고 또한 수나라와 고구려의 국경선은 요녕성의 요하였다고 인식했다. 그렇기 때문에 위에 말한 좌우 12 수군의 경유지를 현재 요녕성의 요하 동쪽으로 착각하는 오류를 범했다.
그러나 이때 고구려의 수도는 한반도의 대동강이 아니라 북경시 동쪽 발해만의 해변 하북성 진황도시 창려현, 노룡현 일대에 있었고 서쪽 경계는 요녕성의 요하 유역이 아닌 하북성의 역수 유역이었다.
하북성 보정시 역수를 중심으로 그 동쪽은 고구려 땅이고 남쪽은 수나라 영토였으므로 이때 수군의 좌우 12군의 경유지는 하북성 남쪽 보정시에서 하북성 동쪽 진황도시 사이 고구려 영토 안의 지명들이다.
지금까지 고구려의 평양성 공격을 최종 목표로 설정한 수양제가 수군의 제1차 집결지를 왜 탁군으로 삼았는지 주목한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필자는 이를 수, 당시대 고구려의 서쪽 경계가 북경 남쪽의 역수 유역이었음을 증명하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고 여긴다.
그리고 608년 수양제는 황하 북쪽에 있는 여러 군의 남녀 100여만 명을 동원하여 대운하를 건설했는데 북경에서 항주까지 연결했다고 해서 이를 경항운하(京杭運河)라 호칭한다. 경항운하는 만리장성, '사고전서'와 함께 중국의 3대 기적으로 손꼽힌다.
그러나 수, 당시대의 대운하는 낙양을 중심으로 북쪽으로는 북경이 아닌 북경시 남쪽의 하북성 탁군까지 도달하였다.
수양제가 건설한 대운하의 북방종점이 오늘날의 북경시가 아닌 북경시 남쪽의 탁군이었다는 사실도 수나라의 동쪽 영토는 탁군까지였고 탁군 이동은 고구려의 영토였음을 입증하는 또 하나의 근거가 된다고 하겠다.
역사학박사·민족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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