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간주 나뭇가지를 불에 구워 코뚜레를 만들었다// 귀를 쫑긋대며 새끼는 어미에게 몸을 묻었다// 뜸베질을 하며 어미는 모질게 새끼를 떠다박질렀다// 영문 모르는 새끼가 목을 뽑아 울었다// 삐죽이 뿔이 돋아나 있었다
<시집 『자라는 돌』 창비 2011>
송진권의 시 「정을 떼다」는 머리에 뿔이 날 만큼 자란 송아지와 젖을 떼려고 모질게 뜸베질하는 어미 소의 행동이 눈에 선하게 들어온다. 이 무렵 소 주인은 노간주나무나 소태나무 가지를 베어다 불에 굽고 둥글게 굽혀서 코뚜레를 만든다. 힘이 올라 날뛰는 송아지를 코뚜레로 길들여 일소로 부리거나 시장에 내다 판다. 요즘 농촌의 기계화로 일소가 사라짐에 따라 코뚜레는 보기 드물어 농경시대 추억의 물품이 됐다.
노간주나무를 직접 볼 기회가 많지 않는 도시인이나 현대인들은 이 나무를 잘 모른다. 양주 드라이진(Dry Gin)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설명하기가 편하다. 진(Gin)의 독특한 향을 내는 열매가 바로 서양 노간주나무에서 열리기 때문이다.
노간주나무 이름은 어디서 비롯됐을까? 강원도와 경기도 지역 토박이말 중에서 '노간주'라는 말이 있다. 경북 지역에서는 노가지나무, 코꾼지나무 등으로 불렸고 경남 지역에서는 소코뚜레나무라고도 칭했다. 지역에 따라 노송(老松), 코뚜레나무라는 이름도 보인다. 조선후기 실학자 유희가 쓴 어휘집 『물명고』에는 '刺松(자송) 노가ᄌᆞ나무'로 나온다. 1937년 조선박물연구회서 펴낸 『조선식물향명집』에는 '노가주나무(노간주나무) 老柯子'로 기록돼 있다.
노간주나무는 측백나뭇과 향나무속의 다른 나무처럼 줄기의 껍질이 세로로 쭉쭉 갈라지며 터실터실해서 오래 묵은 나무 같이 보인다. '늙은 가지를 가진 나무'라는 뜻의 한자말 노가자목(老柯子木)에서 이름의 유래를 추정하지만 중국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한자명이다. 한자 음(音)을 빌려 쓴 말인 듯하다. 중국 이름인 杜松(두송)은 두(杜)나라에서 나는 소나무라는 뜻이다.
◆척박한 땅에서도 꿋꿋이 생장
성장 속도가 느리고 추위에 잘 견디는 상록침엽수인 노간주나무는 메마르고 척박한 땅에서도 자란다. 싹트는 힘이 강하고, 잎은 침처럼 뾰족하고 끝이 날카로워 함부로 만지면 찔려 상처 나기 십상이라서 초식동물들은 입에 댈 수 없다. 잎의 길이는 손가락 한 마디 정도이고 가지와 거의 직각으로 3개씩 일정한 간격으로 돌려난다.
암·수나무가 다르고, 암나무에는 5월쯤 꽃이 피며 열매는 한 해 건너 다음해 10월에 검붉게 익는다. 새들의 입맛에 잘 맞는 과육 덕분에 씨앗이 여기저기로 전파되었고 어려운 성장 환경에서도 자손을 이어가고 있다.
다른 나무들이 살기 힘든 땅이나 바위틈에 뿌리를 내리니 빨리 자라려는 욕심을 내지 않는다. 땅에 영양가가 없으니 수형은 싸리나무 빗자루처럼 날씬한 몸매를 자랑하게 될 수밖에 없다. 곧게 자라면서 가지가 모두 하늘을 향하여 뻗으며 촘촘하게 붙어있다. 야산에서 노간주나무는 키 5~6m, 줄기 직경이 한 뼘 정도까지 자란다고 하지만 산에서 볼 수 있는 몸피는 기껏해야 어른 종아리만 하다.
물론 수백 년 된 노거수도 더러 있다. 경상남도 합천군 봉산면 권빈리 오도산 자락의 밀양 손씨 월선공파 묘지 옆의 노간주나무는 둘레가 3.1m, 나무 높이가 10m 넘는다. 또 강원도 정선군 임계면 문래리에 있는 보호수 노간주나무는 키 8.4m, 줄기둘레가 두 이름이 넘는 3.6m에 나이는 350년에 이른다.
◆노간주나무의 다양한 쓰임
노간주나무는 코뚜레뿐만 아니라 옛날부터 농경사회의 농기구, 각종 생활도구를 만드는 재료로 쓰였다. 목재는 비교적 견고하며, 황갈색을 띠고 나이테의 폭이 좁다. 나무가 물에 잘 썩지 않으며 질기고 탄력성이 좋아서 지팡이나 소쿠리 테두리로 활용됐다. 대나무가 자라지 않는 지역에서는 줄기에 붙은 잔가지와 껍질을 제거하고 장대나 바지랑대로 사용되었고 곡식을 터는 농기구인 도리깨의 긴 채로도 쓰였다. 또 껍질은 천의 염료로 쓰였다고 하니 버릴 게 하나 없다.
어릴 적에 노간주나무 가지를 아궁이에 넣어 불을 붙이면 타닥거리는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단번에 확 타버렸던 기억이 있다. 줄기와 잎에 송진과 기름이 많아 정월 대보름에 태우는 달집에는 노간주나무가 빠지지 않았다. 불길 속에서 타닥타닥 소리가 크게 날수록 풍년이 들 징조라고 믿고 좋아했다.
위스키로 유명한 스코틀랜드에서는 노간주나무가 하이랜드 협곡에서 불법으로 증류할 때 땔감으로 사용되었다고 전해진다. 나무를 태워도 연기가 눈에 거의 보이지 않아서 지역 세관원과 세금 징수원의 눈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 나무가 탈 때 나오는 독특한 향을 이용해 육류와 생선 등의 훈연에도 사용된다.
◆열매는 술의 풍미 더해주는 원료
오 헨리의 단편소설 『마지막 잎새』에서 병실 창밖의 담쟁이 잎이 다 떨어지면 자기도 죽을 것으로 생각하는 환자 존시를 위해 담벽에 담쟁이 잎사귀를 밤새도록 그린 늙은 화가 베어먼이 즐겨 마신 술이 진(Gin)이다.
진은 곡물을 발효시킨 알코올에 서양 노간주나무(Juniperus communis)의 열매(주니퍼베리)를 푹 담근 후 증류시켜 만든 술이다. 입속에서 톡 쏜 뒤 얼얼하고 시원하며 화하게 번지는 상쾌한 향이 진의 매력이다. 17세기 네덜란드에서 노간주나무 열매의 정유가 가진 이뇨효과를 이용하기 위하여 약용 음료로 개발했고 영국에서 단맛을 없앤 드라이진(Dry Gin)으로 발전시켰다. 이후 미국에서 진토닉, 마티니, 핑크레이디 같은 칵테일의 원액으로 거듭났다.
과육과 과즙이 많고 속에 씨가 들어있는 장과처럼 생긴 열매는 콩알만 한데 고대 그리스부터 술의 방향제로 이용됐다. 노간주나무 열매는 처음에 초록색이었다가 한 해 건너 다음해 10월경에 검보라색으로 여무면 표면에는 윤기가 흐른다. 덜 익은 푸릇한 열매가 진의 상큼한 맛을 내게 해준다. 좋은 와인은 포도가 가장 중요하듯이 드라이진의 풍미도 서양 노간주나무 열매의 생산지에 따라 다르다.
'사티(Sahti)'로 불리는 핀란드 발효 맥주는 전통적으로 노간주나무와 홉(hop)을 사용해 맛을 내고, 노간주나무의 잔가지를 이용해 걸러낸다. 그렇게 만들어진 거품이 풍부한 맥주는 바나나와 노간주나무의 쌉쌀한 맛이 돈다.
프랑스의 과실주 '제네브레트(genevrette)'는 보리와 주니퍼베리를 같은 양으로 섞어 만드는데 깊은 풍미를 자랑한다.
우리나라의 노간주나무(Juniperus rigida Siebold & Zucc.) 열매도 술을 만드는 데 부족하지는 않다. 완전히 익기 전에 따서 소주 한 되에 열매 20개 정도를 넣고 술병을 밀봉한다. 한 달가량 두었다가 뚜껑을 열어 보면 바로 순수한 '코리안 진'인 노간주술 혹은 두송주(杜松酒)가 된다.
◆호환(虎患)의 아픔 간직한 고목
국내에서 가장 큰 노간주나무인 강원도 정선군 문래리의 보호수엔 슬픈 전설이 있다. 나무가 자라는 터전은 백두대간의 1천300~1천400m에 이르는 고산 자락의 오지로 옛날에는 사람보다 호랑이가 더 많았다고 알려진 곳이다.
조선 효종(재위 1649~59) 때 마을에 젊은 부부가 화전을 일구며 살았다. 어느 해 여름 돌잡이 아들을 바구니에 담아 밭가에 두고 여느 때처럼 농사일에 열중했다. 해거름의 눈 깜짝할 새에 비명과 함께 아기가 사라졌다. 알고 보니 호랑이에게 물려간 호환(虎患)이었다. 자식을 잃은 부부는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심정으로 그해 겨울을 지냈다. 이듬해 봄이 되자 아이를 잃었던 밭 가장자리에 노간주나무 새싹이 하나 가냘프게 돋아났다. 부부는 노간주나무가 호환(虎患)을 당한 자식의 환생으로 여겼다. 주위에 돌을 모아 바람을 막으며 정성껏 돌보고 가꾸면서 한 맺힌 응어리를 조금씩 추슬러갔다.
나무의 내력이 후손들에게도 전해지고 대대로 나무를 보호한 까닭에 한낱 코뚜레로 잘려나가지 않고 오늘날 노간주나무로는 드물게 노거수로 성장하여 그 자리를 지키게 됐다.
경상남도 합천군 봉산면 권빈리 오도산 자락 묘지 옆의 노간주나무는 무려 500년이나 묵었다고 한다. 노간주나무는 1년 동안 직경 1mm 미만일 정도로 생장이 매우 느린데 이 나무의 둘레는 3m가 넘으니 가히 견디어온 풍상을 짐작할 수 있다. 노간주나무의 생육특성이 땅속 깊게 뿌리를 내리지 않고 수관 폭이 넓지 않아서 묘지에는 피해를 주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 마을의 후손에 따르면 나무가 위치한 곳은 '시막'이며 12대조 선영의 시묘살이 당시에 이미 뿌리를 내린 상태였다고 한다. 현재 이 나무는 합천군의 보호수로 지정돼 있다.
◆배나무에 치명적인 병 옮겨
노간주나무 품종에는 이름 앞에 해변, 좀, 평강, 서울 등의 접두어가 붙은 게 여럿 있다. 특히 해변노간주나무는 산림청이 지정한 희귀멸종위기식물이다.
영국 스코틀랜드에서 노간주나무는 점차 사라지고 있다. 주된 원인은 향나무 역병균에 의한 뿌리썩음병 때문이라고 한다.
배 농사를 짓는 농부들로부터 미운털이 박힌 게 노간주나무다. 조선 후기 실학자 서유구(徐有榘, 1764~1845)가 저술한 농서 『행포지(杏浦志)』에는 "노간주나무가 옆에 있으면 배나무는 전부 죽는다"고 했다. 배나무의 붉은별무늬병의 중간 기주임을 적은 최초의 문헌이다. 오늘날에도 향나무와 함께 노간주나무를 배 과수원 근처에 얼씬 못하게 한다.
그렇지만 향나무는 늙을수록 품위가 더하고 노간주나무는 겨울이 깊어갈수록 향이 진해진다.
『대구의 나무로 읽는 역사와 생태 인문학』 저자·나무칼럼니스트 chunghaman@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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