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걸 칼럼] 헌법재판소의 역사적 소명

입력 2025-01-05 14:01:21 수정 2025-01-05 18:38:28

홍성걸 국민대 행정학과 교수
홍성걸 국민대 행정학과 교수

지난 연말,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이 국회 추천 3인의 헌법재판소 재판관 중 2명만 임명함으로써 헌재는 일단 8인 체제로 헌재법 제23조 ①항의 의사정족수를 갖추게 됐다. 이에 여야는 모두 비판적 입장을 발표했고, 헌재는 한덕수 전 권한대행의 국회 추천 헌법재판관 임명 보류의 위헌성 심사에 착수했다.

필자는 최 권한대행의 결정이 현 상황에서 최선책이라 주장했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더불어민주당은 수많은 공직자를 탄핵하고는 헌재의 심판을 지연시킬 의도로 그동안 국회 몫 재판관을 추천하지 않아 사실상 헌재를 마비시켰다. 이진숙 방통위원장 탄핵 사건을 심의하는 과정에서 헌재는 이 위원장 측 가처분 신청을 수용해 헌재법 제23조 ①항의 효력을 일시 정지시키고 심사를 이어 나갔다.

이는 위헌법률심판권을 가진 헌재가 스스로 기능 마비에서 벗어나기 위한 고육지책이지만 민주주의 원칙에는 맞지 않는다. 헌재는 입법·사법·행정의 3부에서 각 3인을 추천해 총 9인으로 구성되는데, 의사정족수를 7인으로 한 것은 3부 추천 인사가 적어도 1인은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따라서 6인 헌재가 사건 심사에 착수한 것 자체가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인 삼권분립에 어긋나는 일이다. 헌재는 스스로 삼권분립에 위반되는 결정을 할 것이 아니라 헌재 기능을 마비시키는 것은 헌정 질서 문란 행위임을 경고했어야 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탄핵소추되자 민주당은 급히 3인의 국회 몫 헌법재판관을 추천했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여야 1인씩 지명하고 나머지 1인은 합의해야 하는 관행을 지키지 않은 것이다. 추경호 원내대표 시절, 헌재의 기능 마비를 보다 못한 국민의힘이 헌재를 정상화하려고 지명권을 양보했던 것을 이용해 국민의힘이 반대한 가운데 3인의 헌법재판관에 대한 인사청문회를 반나절씩 급히 진행하고는 야권만 출석한 가운데 본회의를 통과시켰다. 한 전 권한대행이 여야 합의가 불명확하다면서 임명을 보류한 것이나 최 권한대행이 3인 모두를 임명할 수 없었던 근본 이유는 여기에 있다.

최 권한대행으로선 자신에 대한 탄핵소추를 해주면 이 어려운 상황에서 벗어나 편하게 지낼 수 있으니 오히려 개인적으로는 더 좋을 수 있다. 그러나 공직자로서 현 상황에서 국익에 가장 부합하는 선택을 하는 것이 의무라는 점에서 2인을 임명하고 남은 1인은 보류한 것이다.

비록 완전하지는 않아도 심사 불능에서 벗어난 헌재의 과제는 수많은 탄핵소추와 권한쟁의심판 청구를 헌법과 법률에 따라 우선순위를 정해 공정하고 신속하게 처리하는 것이다. 정치적 편향성은 정치권은 물론, 분열된 국민을 자극해 극도의 혼란을 발생시킬 수 있고 역사적 오점을 남길 수밖에 없다. 최대한 신속하게 심판을 진행하되 공정성을 잃어서는 안 된다. 그 점에서 최근 헌재의 판단은 우려스럽다.

헌재는 한 전 권한대행의 헌법재판관 임명 보류를 우선 검토하기로 했다고 한다. 윤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 건을 우선 처리하는 것은 정치적 불확실성을 시급히 줄여야 한다는 명분이 있다. 그러나 헌법재판관 임명 보류에 대한 위헌 제청을 우선 처리한다는 것은 그 명분을 이해하기 어렵다.

헌재가 9인의 완성체로 사건을 결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은 자명하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 탄핵 결정도 8인 체제에서 이루어진 전례가 있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4월 18일에 재판관 중 2인이 퇴임할 예정이기에 1인의 추가 임명이 필요하지만, 그것이 당장 사건 심사에 결정적 하자는 아니다.

헌재는 권한대행의 임명권 행사 보류의 합헌성 여부보다 더 우선순위가 높은 문제부터 처리해야 한다. 지금 훨씬 더 시급한 것은 한 전 권한대행의 탄핵소추 시 적용한 의결정족수 기준을 결정하는 일이다. 민주당은 자신의 요구를 듣지 않는다고 권한대행을 탄핵하는 폭거를 저질렀고 언제 또 같은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다.

권한대행 탄핵의 기준을 확정하는 것은 정치적 불안정성을 줄이는 데 필수적이다. 헌재는 다수 의석에 바탕을 둔 탄핵소추권 남용을 막을 수 있는 방안도 세워야 한다. 지금 한국의 자유민주주의는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다. 민주주의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인 헌재가 지금 해야 할 역사적 소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