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다양한 문화 품은 셀축의 고대도시
파르테논 4배 크기 아르테미스 신전, 고대 3대 거대 도서관 셀수스도서관
25,000명까지 수용하는 원형극장…한대 번성했던 도시 짐작할 수 있어
◆ 눈부신 고대도시의 부활
에페수스, 혹은 에페소스, 에페스라 불러야 할까. 튀르키예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 이즈미르 한켠에 위치한 셀축(Selcuk, 마치 대구의 달성군 같은)의 그 폐허도시 위로 작열하는 한여름 뙤약볕이 내리쬐고 있다. 숨이 턱 막히는 열기는 한 그루 나무는 커녕 그 흔한 잡풀이나 풀벌레들, 살아 숨 쉬는 것들 모두 굴절시켜버리겠다는 듯 시계(視界)마저 휘어놓는다.
이곳은 기원전 10세기 그리스인이 건설했고 페르시아에 점령되었다가 알렉산더 대왕이 정복하고 이후 로마 지배하에 번영했으며 그리스도교 성지였지만 3세기 고트족에 의해 멸망해버린 이오니아의 최대 도시다. 폐허에 간신히 버티고 선 건물 잔해들, 쓰러진 신전 기둥, 부서진 기둥 조각들에 새겨진 역사의 물때가 검거나 희게 피어 있다. 그 흑백 이끼가 화려하다. 눈부시게.
오르한 파묵은 비감한 어조로 쇠락한 고향 이스탄불을 이렇게 묘사했다. '모든 것이 낡고 한적하며 텅 빈 흑백의 단조로운 도시로 바뀌었으며, 거리에서 그리스어, 아르메니아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영어, 히브리어가 사라졌다.' 그러나 에페수스의 눈부신 폐허에는 점심 무렵이 가까워지자 붉고 노란 양산과 모자들이 꽃처럼 피어나고 러시아어, 독일어, 중국어, 베트남어까지 온 세상의 언어가 대리석 거리를 메운다.
250년, 그리스도교 에페수스 7영웅(Seven Sleepers of Ephesus)이 로마황제 데키우스의 박해를 피해 동굴에 숨어 잠들었다가 2백년 후 부활했다는 전설처럼 1090년, 셀주크에 점령당했다가 실트(큰 모래알갱이)와 전염병, 지진 등으로 해안에서 멀어지고 버려진 채 천 년 동안 잊혀졌다는 항구도시가 1896년 시작된 발굴로 부활한 덕분이다.
◆여신이 거닐던 땅
리디아의 마지막 왕 크로이소스는 미다스의 후손으로 고대 이오니아 최고 부자였다. 인구 25만 도시 에페수스를 정복한 뒤 자부심 강한 시민들을 회유하기 위해 기원전 550년 다산과 부를 가져다주는 사냥과 달의 여신 아르테미스(디아나) 신전을 지었다. 당시로선 흰 대리석으로 지은 최초의 신전으로 높이 18미터, 기둥 127개, 길이 120미터, 폭 60미터로 파르테논 신전보다 4배 크기였다.
이후 도시는 페르시아 키루스 대왕에게 정복당하고 시간이 흘러 다시 점령한 알렉산더 대왕이 신전을 보며 이렇게 감탄했다. '나는 막강한 도시 바빌론에서 마차들이 달리던 성벽도 보았고 제우스신상, 공중정원, 피라미드, 마우솔로스왕의 무덤도 보았다. 그러나 석양 무렵 처음 본 이 신전의 아름다움은 올림피아 외엔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없구나.'
과일과 꽃을 생산해 내는 자연과 대지, 모든 사물과 공기와 바다를 다스리며, 동물들의 생명을 지켜 길들여 멸종을 막고, 새 생명의 탄생을 돕는 아르테미스는 제우스의 딸이며, 태양신 아폴론의 누이다. 풍요를 상징하는 이 여신은 가슴에 무수한 유방이 달린 다소 기괴한 모습으로 사냥의 여신답게 수사슴, 황소, 사자, 그리핀, 스핑크스, 세이렌을 거느리고 있다.
순결, 정절의 상징으로 처녀의 수호신에 대한 숭배와 신봉이 얼마나 열렬했던지 침략세력에 의해 다른 신들이 도입되어도 인신공희(人身供犧, 사람의 몸을 희생 공물로 바치는 제사 의식)까지 있었다고. 신전은 모조리 파괴되었고, 현장에는 복제한 여신상이, 실물은 오스트리아 비엔나박물관에 있다.
◆인류 인문과학문명의 표징, 셀수스도서관
고대 이오니아, 크레타, 미케네, 트로이 그리고 페르시아, 로마, 크리스트문명이 켜켜이 쌓인 에페수스 인근은 인재들의 산실이었다. 호메로스, 헤라클레이토스, 피타고라스, 데모크리토스, 레우키메스, 아르키메데스, 유클리드, 아리스타르쿠스, 솔론 등이 에페수스와 인근 출신이었다.
말 그대로 찬란한 인류 인문과학문명이 이곳에서 촉발되어 에게해와 지중해를 통해 전 유럽으로 전파된 것이다. 그 표징인 양 셀수스도서관이 여기 있다. '두둥' 우레처럼 현현(顯現)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 이것이 일종의 스탕달 신드롬이란 것일까.
117년 로마 집정관 셀수스(Kélsos)를 위해 그의 아들이 지은 2층 도서관은 장서(주로 양피지였을 것이다.) 1만 2천권이 소장되어 알렉산드리아, 페르가몬과 함께 고대 3대 도서관으로 일컬어졌다. 262년 화재로 다량의 도서가 소실되고 10세기 경 여러 번 발생한 지진으로 무너진 도서관은 흙에 묻혔다가 잔해로 발굴되었다.
실내엔 여신 아테네의 좌대만 덩그렇고 거의 허물어진 빈 터마저 너무나 아름다워 멍하니 바라보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다. 정교한 문양의 전면 감실에는 지식, 지성, 미덕, 지혜의 네 여신이 신체 일부가 각각 훼손된 채 서 있는데 그 불완전함 또한 긴 드레스 주름처럼 우아하다.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황제 통치 기간(기원전 27년부터 50여 년쯤)이 에페수스의 가장 찬란한 번영기였다. 이오니아와 코린트식 열주가 늘어선 대리석 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여전히 햇볕은 뜨겁다. 셀수스 도서관에서 헤라클레스의 문까지의 쿠레테스거리는 고급 상점가였다고. 날개가 달린 두 마리 뱀이 돌에 새겨진 카두세우스 문양 너머론 의과대학이었다 한다.
메두사와 니케 여신을 새겨 넣은 하드리아누스신전과 트라야누스 분수, 목욕탕 그리고 인류 최초였을 수세식 공중화장실과 또 세계 최초의 광고였다는 홍등가 발자국 문양을 지나니 원로원 건물이었을 아고라가 있다. 여기서 아테네와 로마보다 그리스, 이탈리아 고대건축물을 많이 본 듯한데 이제 30% 발굴한 것이며 향후 150년간의 발굴 계획이 잡혀 있단다.
◆해질녘, 짙고 푸른 에게해
나지막한 구릉을 배경으로 한 거대한 원형극장은 2만5천명을 수용했다 하고, 1993년 구릉 뒤쪽에서 발굴된 검투사들 묘 68기 중 66명이 20대 남성이었다니 그 고대의 젊음과 죽음이 비감하기 이를 데 없다. 그뿐이랴. 사자, 호랑이, 불곰, 코끼리, 하마, 코뿔소 같은 맹수에게 먹이로 내던져진 초기 그리스도 신자들도 부지기수라 한다.
그러고 보니 신전 입구와 대리석 담에 새겨져 있던 익투스(ἰχθύς, 물고기) 문양이 생각난다. 아, 에베소! 그리스도가 승천하면서 열두 제자 중 가장 나이 어린 요한에게 성모 마리아의 앞날을 부탁하자 그가 코레소스 산에 집 한 채를 지어 성모 마리아가 선종할 때까지 모셨다는 곳이 또 여기다.
세계 최초 성모 마리아 봉헌성당으로 원래는 주춧돌만 남았는데 프랑스의 그랑시 수녀가 작고 정갈한 성당을 세웠다. 계단을 내려가면 솟아나는 성수는 만병통치약으로 알려져 있고, 그리스도교뿐만 아니라 이슬람교도들에게도 성지로 각광받고 있다 한다.
사도 요한은 성모 승천 후 로마의 박해를 받으며 여러 이적을 일으키고 밧모섬으로 유배되었다가 복음서와 요한의 세 편지, 요한묵시록을 쓰고 열두 제자 중 유일하게 에페수스에서 자연사했다.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중 한 곳인 이곳 에페수스 아르테미스 신전 뒤쪽에 성 요한교회 터가 있고 그의 무덤이 있다.
딥 블루(Deep Blue), 해질녘 짙고 푸른 에게해를 건너면서 플라톤이 열 번째 뮤즈라 격찬한 고대 그리스 서정시인 사포(Sappho)를 생각한다. 이즈미르에서 바로 건너다보인다는 레스보스섬이 저쪽 어디일까. 각각 동로마제국과 오스만 튀르크계 후예들인 그들의 관계가 한일관계만큼이나 첨예하다는데 2025년 새해에는 그리스, 튀르키예 양국 관계가 진심으로 좋아지기를 빌어본다. 물론 새해 우리나라의 평안과 안녕 또한.
시인 박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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