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속 호모에스테티쿠스] <50> 마르틴 발저의 '불안의 꽃': 노년의 에로스

입력 2024-12-23 13:12:25

이경규 계명대 교수

이경규 계명대 교수
'불안의 꽃' 책 표지
이경규 계명대 교수

사람은 늙어도 아름답고 싶은 욕망이 있다. 내면적 아름다움이니 정신적 아름다움이니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미(美)보다 선(善)에 속한다. 선은 미추를 초월하고 시간에 매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사람이 느끼는 아름다움은 시공의 영향을 받는다. 생로병사를 따르는 생명체는 대체로 젊은 시절에는 아름답지만 늙으면 흉해진다. 물론 예외는 있다. 특히 식물이 그러한데 전나무는 가뭄이 심하거나 환경이 악화하면 평소보다 더 화려한 꽃을 피운다고 한다. 또 용설란은 100년에 한 번 꽃을 피우고 그 뒤엔 죽는다고 한다. 꽃을 미의 정수라고 하면 저러한 식물들은 죽음 직전에 혹은 노년에 가장 아름다워지는 셈이다.

저런 식의 개화에 대해 독일 식물학자들은 '불안의 꽃(Angstblüte)'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소멸이나 죽음에 대한 불안이 예상치 못한 꽃을 피우게 한다는 것이다. 문학적으로 보면 매력적인 메타포가 된다. 그러나 사전에 등재되지도 않은 단어라 그런지 문학계에서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2006년 마르틴 발저가 '불안의 꽃'이라는 장편 소설을 내놓으면서 사정이 많이 달라졌다. 이것은 아주 복잡한 소설이지만, 칼이라는 71세의 한 투자 상담가가 33세의 여배우를 만나 벌이는 로맨스가 서사의 중심을 이룬다. 칼 쪽에서 '불안의 꽃'을 피운 셈이다. 과연 이 꽃의 실제 모습은 어떨까? 당겨서 말하자면, 일반 사람들의 눈에는 그리 아름다운 모습은 아닌 것 같다.

금융자본주의의 생리를 꿰뚫고 있는 칼은 투자 사업으로 상당한 성공을 거둔 노신사다. 그는 화려한 소비로 돈 자랑을 하거나 권력의 주변을 맴도는 자본가와는 거리가 멀다. 칼은 돈의 논리에 형이상학적인 특성을 부여하고 그것을 지향하는 귀족 자본주의자다. 그의 성(姓)에 귀족 표시인 '폰 von'(Karl von Kahn)이 붙어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돈의 의미는 숫자다. 숫자는 인간이 가진 것 중에 가장 정신적인 것이고 모든 임의성을 뛰어넘는 것이다. 이자는 돈의 정신화이오. 이자가 이자를 낳으면 정신화는 음악적 선율이 되고 종교를 경험하게 한다.(p.244)

칼에게 돈은 소비를 위한 것도, 권력을 얻기 위한 수단도 아니다. 그에게 돈은 수의 유희 외에 다른 목적은 없다. 예술을 위한 예술보다 더 순수한 무목적의 목적이다. 돈은 자유를 보장해 줄 뿐 아니라 그 자체가 자유다.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관점에서 보면 기괴한 궤변이고 기껏해야 정교한 반어법으로 볼 수 있다. 특히 디지털 시대의 시뮬라크르 경제에 대한 통렬한 비판으로 읽을 수 있다. 숫자로서의 돈은 원본도 없고 복사도 없다. 진짜와 가짜도 없다. 기호와 이미지만 부유할 뿐이다. 사람이 수를 가지고 노는지 수가 사람을 가지고 노는지 알 수 없다. 요컨대, 칼의 돈 철학은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고 부정적으로 볼 수도 있다.

이제 중요한 것은 그렇게 정신화된 수의 장(場)에서 놀던 칼이 아름답고 섹시한 여배우 요니를 만나면서 결정적인 전기(轉機)를 맞는다. 돈의 세계와는 달리 요니는 육체와 섹스로 가장 구체적이고 실체적인 존재 체험을 제공한다. 사실 그녀는 2백만 유로의 영화 자금을 끌어들이기 위해 칼에게 접근한 '꽃뱀'이다. 칼도 이 사실을 알고 있지만 처음 만나는 순간부터 빠져나갈 수 없다는 사실을 예감한다. 그는 살아 약동하는 여체를 안는 대신 2백만 유로를 기꺼이 넘긴다. 목적을 달성한 요니는 얼마 뒤 칼을 떠나고 칼의 불륜을 알아챈 아내(헬렌)도 떠난다. 혼자 남은 칼은 아내에게 긴 편지를 쓰고 이 편지가 소설의 마지막을 차지한다. 편지의 내용은 그의 진솔한 고백이다.

지금까지 숨겨왔지만 70이 넘어서도 젊은이와 다를 바 없이 욕망이 꿈틀거리고 다른 상황에서 다른 사람을 만나면 다른 인생을 살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다. 개인은 모두 그 자체로 고유하고 유일하므로 근본적으로 불륜이란 있을 수 없다. 아침에 빵을 먹었다고 저녁에 사과를 먹지 말란 법은 없다. 죽음에 가까워질 만큼 나이가 들었다고 삶을 충분히 산 것은 결코 아니다. 시들어 가면서도 격렬하게 즐길 수 있어야 한다.

긴 고백에 도덕 감정이나 양심 같은 것은 조금도 드러나 있지 않다. 수라는 논리와 합리성의 허울을 벗어던지고 육(肉)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고백할 뿐이다. 그렇다고 죽음을 앞둔 식물의 개화가 아름답듯이 노년의 욕망도 아름답다고만 주장하지는 않는다. 그 반대를 비유로 이야기한다.

목욕을 마치면 목욕물은 최대한 빨리 하수구로 빠져나가려 한다. 그게 보기에 좋다. 만일 더러운 물이 사라지지 않겠다고 저항한다면 얼마나 웃기겠는가.(P.477)

노년의 에로스가 불안의 꽃처럼 아름다울 수 있는지, 목욕물처럼 추한 것인지는 각자가 살면서 판단할 몫이다. 문학 작품을 읽는 방식도 마찬가지다. 필자는 지난 2년 동안 50여 편의 문학 작품을 소개하고 나름대로 비평해 보았다. 독서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는 글이었다면 더없는 보람이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