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일본 에도막부는 세를 넓혀 가던 가톨릭 신자를 색출하는 방식으로 '후미에(踏み絵)'를 썼다. 십자가상(像)이 새겨진 금속판 위를 밟고 지나가게 했다. 밟기를 거부하는 건 물론 심적 동요(動搖)가 있어 보이기만 해도 신자로 판단했다. 종교적 양심에 기대면 분간할 수 있을 거라 봤다. 이런 풍경이 유럽인의 눈에는 희한했을 것이다. 19세기에 발간된 '걸리버 여행기'에도 후미에와 관련된 것으로 추정되는 문구가 실렸다. 선장이 일본 군관에게 '걸리버가 아직 십자가를 밟지 않았다'고 말하는 장면이다.
'국가인권위원회 바로잡기 공동행동'이 10일 세계 인권의 날 기념식에 가는 안창호 국가인권위원장을 막아서며 입장 표명을 요구했다. 이들은 "개인적 입장이라도 밝히라"고 요구했다. 전쟁통에 아군 식별 암구호도 아니고 색깔 논쟁과 다를 게 뭔가 싶다. 만일 안 위원장이 "비상계엄 선포는 내란 기도다"라고 답했다면 문제시되지 않는 것인가.
헌법 19조 '양심의 자유'를 들먹이지 않아도 '양심인지감수성'이 의심되는 답변 강요다. 대관절 헌법 정신은 깨어 있는 시민들도 공감할 수 없는 문구에 불과했단 말인가. 비슷한 살풍경은 인사청문회에서도 목격된다. "5·16이 혁명이냐" "건국일이 언제냐"는 질문들이다. 재깍 답하지 못하면 호된 질책(叱責)을 받고, 원하는 답을 말하지 못하면 낙마도 감수해야 한다.
어느 쪽도 아닌데 목숨이 위태로운 때가 있었다. 70여 년 전 지리산 자락은 밤낮으로 "너는 어느 편이냐"는 물음에 떨어야 했다. 빨치산은 밤의 지배자였고 군경토벌대는 낮의 지배자였다. 빨치산 토벌에 나섰던 차일혁 총경은 광기의 시대를 자서전에 남겼다. "새벽부터 들판에서 일하는 농부들에게 물어봐라. 공산주의가 무엇이며, 민주주의가 무엇이냐고. 과연 몇 사람이 이를 알겠는가?"
"너는 어느 쪽이냐"는 물음은 환대 혹은 배제로 귀결된다. 차별하겠다는 포고(布告)다. 정치 이슈가 안주로 나왔을 때 정치에 관심이 없다고 답하는 게 불문율인 줄 알았는데 이젠 안 먹힌다. '무개념'이라고 찍힌다. 가수 임영웅이 그렇게 당했다. 비슷한 정치 성향끼리 모였다고 온전히 같은 편이 되는 것도 아니다. 가르고 나누는 게 습성이 된 이들은 또 계파별로 나뉘어 죽일 듯이 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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