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삼의 근대사] 역사에서 배우는 정변·쿠데타 성공과 실패의 교훈

입력 2024-12-17 04:30:00

지도자 의지·무력 수단·동조 세력 없이…'무모한 시도'의 파국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및 해제로 인해 국가 리더십 붕괴 사태가 발생했다. 어느 나라, 어느 시대나 위기는 닥치게 마련이다. 문제는 그런 위기를 그 나라 지도부가 스스로의 힘으로 슬기롭게 극복하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다. 위기를 잘 극복하면 도약의 기회가 될 수 있지만, 파고를 넘지 못하면 국가가 전복되거나 파국을 맞을 수도 있다.

조선 500년 역사에서 대표적인 정변·쿠데타는 1453년 계유정난(癸酉靖難),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을 꼽을 수 있다. 그런데 어떤 정변은 성공했고, 어떤 정변은 실패했다. 그렇다면 조선시대에는 왜 이런 반정·정변이 일어났을까?

정도전은 조선의 통치 시스템을 국왕과 신하들이 합심하여 조화와 균형 이루는 군신공치(君臣共治) 체제로 구축했다.
정도전은 조선의 통치 시스템을 국왕과 신하들이 합심하여 조화와 균형 이루는 군신공치(君臣共治) 체제로 구축했다.

조선의 통치체제를 수립한 것은 정도전이다. 그는 신생국 조선은 국왕과 신하가 서로 의논하여 통치하는 군신공치(君臣共治)를 지향했다. 정도전은 국가의 최고 권위자로서 국왕의 실권은 인정하되, 왕권은 신하의 충고와 견제로 제한되도록 통치 시스템을 구축했다. 왕권과 재상권의 견제를 위해 사헌부·사간원·홍문관 등 3사(三司)의 권력을 대대적으로 강화했다.

3사 관리들의 품계는 높지 않으나 학문과 덕망 높은 문과 출신자 중에서 과거시험 성적 우수자들을 임명했다. 이들의 고유 업무는 왕의 잘못을 논하는 간쟁(諫爭), 왕의 부당한 처사나 명령을 시행하지 않고 되돌려 공박하는 봉박(封駁), 국왕이 관리를 임명하거나 법령을 제정할 때 동의하는 서경(署經)이었다.

그는 이런 체제를 왕권과 신권(臣權)이 합심하여 조화와 균형 이루는 체제로 선전했다. 하지만 실상은 왕권을 약화시키고, 신권을 왕권과 같은 수준으로 격상시키기 위한 고도의 정치 행위였다. 3사가 강력하게 국왕의 통치 행위에 간섭하면서 조선 국왕은 제대로 된 리더십을 발휘하기 곤란했고, 실권은 별로 없는 상징적 존재와 비슷했다. 이러한 군신공치 시스템에 반발하고 나선 인물이 세종의 둘째 아들 수양대군이었다.

세종은 적통 장자인 문종을 세자로 삼았다. 문종은 영민했으나 건강이 좋지 않아 재임 2년 만에 승하했다. 권력 공백 상태에서 세상 물정 모르는 12세의 단종이 즉위하자 왕권은 형해화 되고 신권은 더욱 강화되었다. 김종서(좌의정)를 중심으로 황보인(영의정)·정분(우의정) 등이 권력을 장악하자 왕권 강화를 고대했던 수양대군이 정변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세종의 둘째 아들 수양대군은 12세의 조카 단종이 즉위하자 대신들이 권력을 강화하는 모습을 보고 왕권을 되찾기 위해 계유정난 쿠데타를 일으켰다. 사진은 영화
세종의 둘째 아들 수양대군은 12세의 조카 단종이 즉위하자 대신들이 권력을 강화하는 모습을 보고 왕권을 되찾기 위해 계유정난 쿠데타를 일으켰다. 사진은 영화 '관상'에서 수양대군 역을 맡았던 이정재의 모습.

◆아웃사이더들을 동지로 포섭한 수양대군

가장 먼저 자신의 두뇌 역할을 하게 될 한명회·권람 같은 아웃사이더 인재를 포섭했다. 이들을 중심으로 집현전 학사 출신 신숙주를 끌어들였고, 무력 동원을 위해 생사를 함께 할 무관들을 자기 편으로 만들었다. 포섭자 중 신숙주를 제외하면 앞길이 보장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이 능력은 출중했으나 변변치 못한 한직을 전전하는 불평불만 세력이었다.

1453년 10월 10일, 거사일에 수양대군은 거병의 당위성을 설명하고 진격하려 했다. 그런데 동원된 병력 중 상당수가 겁을 먹고 도주했다. 수양대군은 얼마 남지 않은 수하들 앞에서 "나 혼자서라도 결행하겠다"라며 분연히 일어섰다. 그는 단종 권력의 핵심인 김종서를 철퇴로 공격, 중상을 입혔고, 김종서의 아들 김승규와 주변 하인들을 살해하여 권력 공백 상태를 만들었다.

이어 경복궁을 장악하고 단종의 어명을 빙자하여 조정 대신들을 모두 입궐시킨 후 쿠데타 찬성파는 살려주고, 반대파는 처형했다. 계유정난은 동조 세력의 포섭, 위기 속에서 지휘관의 결연한 의지가 승패를 가른다는 교훈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어머니의 죽음을 왕권 강화의 기회로 활용한 연산군

중종반정은 조선 10대 국왕 연산군을 몰아내고, 그의 이복동생 진성대군(중종)을 옹립한 신하들의 쿠데타였다. 성종의 장남 연산군은 즉위 초에는 북방 여진족을 회유하여 국경을 안정시키고, 왜구 격퇴 등 능력 있는 모습 보였다. 또 학문과 예술을 장려하고 세금 체계를 정비했으며, 신하들과도 우호적인 관계 유지했다.

연산군이 이상 성격이 된 이유는 어머니(폐비 윤 씨) 때문으로 알려졌다. 후궁으로서 성종의 총애를 받았던 윤 씨는 성종의 왕비(공혜왕후 한 씨)가 사망하면서 정식 왕비로 간택되었다. 윤 씨는 연산군을 출산한 후 산후 우울증 덕분인지 왕에게 질투·저주 행위를 하다가 폐위되었고, 3년 후 사약을 받고 죽었다.

후에 이 사실 알게 된 연산군은 무오사화·갑자사화를 일으켜 신권을 옭죄고 왕권 강화의 기회로 활용했다. 연산군은 간언을 통해 국왕의 권한을 옭죄는 3사를 정확하게 타격했다. 이들의 활동을 봉쇄한 후 조정의 세력 균형을 무너뜨리고 절대 권력을 장악했다.

견제 세력이 사라지자 연산군은 국정을 물리치고 사치와 낭비, 향락과 패륜 행위로 날을 지샜다. 국왕의 통치력 강화를 위해서는 자신의 권력을 옹호하기 위한 친위세력의 구축이 필수적이다. 무슨 까닭인지 연산군은 친위세력도 그냥 놔두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여진족 토벌, 이시애의 난 진압 등 실전 경험이 풍부한 유자광을 비롯하여 고위급 무관인 박원종 등이 쿠데타 세력에 합류하면서 연산군은 제풀에 무너졌다.

조선 왕조 최초로 신하들이 국왕을 몰아내는 반정이 손쉽게 성공한 이유는 친위세력마저 제거하고 독단적으로 국정을 운영한 때문이다.

광해군은 뛰어난 외교력과 통치능력으로 왕권을 강화하던 중 신하들 쿠데타로 쫓겨났다. 조선시대 정변은 대부분 왕권과 신권의 충돌로 발생했다. 사진은 광해군 시대를 비경으로 한 영화
광해군은 뛰어난 외교력과 통치능력으로 왕권을 강화하던 중 신하들 쿠데타로 쫓겨났다. 조선시대 정변은 대부분 왕권과 신권의 충돌로 발생했다. 사진은 광해군 시대를 비경으로 한 영화 '왕이 된 남자' 포스터.

◆억지 명분 앞세워 일으킨 인조반정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 광해군이 폐위되고 능양군(인조)이 등극했다. 선조의 둘째 아들 광해군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켜 왜군과 싸우는 등 맹활약했던 인물이다. 그의 재임기는 만주에서 여진족이 들불처럼 일어나 강력한 세력(후금)을 형성했고, 명나라는 기울기 시작했다. 광해군은 명과 후금 사이에서 절묘한 균형 외교를 통해 평화를 유지한 외교의 달인이었다. 또 대동법을 시행하여 공납으로 고통받는 백성의 부담을 덜어주었다.

인조반정의 명분은 "명나라에 사대하지 않은 배신자", "폐모살제(廢母殺弟, 어머니를 폐위하고 동생을 죽였다는 듯)를 한 패륜아" 척결이었다. 광해군의 계모인 인목왕후는 19세 때 32세 연상의 선조의 왕비로 간택되었다. 세자 광해군은 자기보다 9살이나 어린 새파란 여성을 계모로 모셔야 하는 기구한 운명에 처했다.

게다가 인목왕후는 선조와의 사이에서 영창대군을 생산하자 권력욕이 폭발했다.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자기가 낳은 젖먹이 아들을 세자로 책봉하기 위해 온갖 일을 다 벌였다. 광해군 입장에서는 용서하지 못할 권력에의 도전이었다. 폐모살제는 쿠데타 세력이 억지로 만들어낸 것이고, 실제 이유는 광해군이 신권과 맞서 당당한 논리와 지혜로 왕권을 강화한 국왕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왕권 강화를 추진했던 연산군·광해군은 신하들에 쿠데타에 의해 패륜아·폭군으로 낙인찍혀 역사의 무덤에 순장되었다.

인조반정으로 망해가는 명나라에 사대를 주장하는 세력이 권력을 잡았으니 조선 외교는 걷잡을 수 없이 붕괴되었다. 결국 떠오르는 태양 여진족을 자극하여 침략을 자초한 것이 정묘호란·병자호란이다. 두 차례 반정으로 왕권이 약화되다 보니 대신들이 권력을 좌우하는 세도정치로 변질되었다. 이후 극단적인 소중화 사상을 앞세운 가문 간 당파싸움으로 나라는 완전 거덜났다.

갑신정변은 주동자들이 왕권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인사를 하고 법령을 발표하자 이에 반발한 고종이 청군에게 쿠데타 진압 요청을 하여 실패했다. 사진은 갑신정변 주도자들이 일본 망명 때의 모습(왼쪽부터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김옥균).
갑신정변은 주동자들이 왕권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인사를 하고 법령을 발표하자 이에 반발한 고종이 청군에게 쿠데타 진압 요청을 하여 실패했다. 사진은 갑신정변 주도자들이 일본 망명 때의 모습(왼쪽부터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김옥균).

◆왕권 무시했다가 자멸한 갑신정변

1884년 갑신정변은 세도정치의 폐해에 찌든 나라를 개혁하고 근대화를 추구하기 위한 소장 개화파의 쿠데타였다. 조정 세력 분포상 개화파는 극소수였고, 오피니언 리더인 선비·유생 집단 중에서 개화 찬성 세력은 한 줌도 안 되었다.

동조 세력이 없는 상태에서 개화파가 일본 세력을 등에 업고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 갑신정변이다. 당시 일본은 근대화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돼 군사력이나 국력이 청나라에 크게 열세였다. 일본 정부는 주한 일본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에게 조선 개화당 쿠데타에 참여하지 말라고 훈령했다. 다케조에 공사는 훈령이 도착하기 전에 독단적으로 조선 주재 일본군 150명을 개화당 쿠데타에 가담시켰다.

잘 나가던 갑신정변은 주도 세력이 국왕을 제쳐놓고 제멋대로 인사를 하고, 법령을 발표하면서 하루아침에 무너졌다. 왕권을 무시당한 고종은 비밀리에 청군에게 개화당의 쿠데타 진압을 요청했다. 청나라는 조선 주둔 청군 1,500명을 동원하여 일본군을 공격했다. 패퇴한 일본군은 일본으로 탈출했고, 김옥균·박영효·서재필·서광범 등도 일본에 망명하여 갑신정변은 사흘 천하로 막을 내렸다.

조선의 통치 시스템인 군신공치는 몇 차례 정변 통해 신권이 극도로 강화된 신권 유토피아 사상으로 변이를 일으켜 한국 정치인들의 유전인자가 되었다. 이승만·박정희·전두환 같은 카리스마 강한 지도자 시대에는 숨죽이고 있던 유전인자는 민주화 세력이 부활할 6공에서 대폭발을 일으켰다.

1987년 6·29 선언 이후 제정된 6공 헌법의 특징은 대통령 권한의 대폭 축소, 국회 권한의 대폭 확대다, 대통령의 국회 해산권은 폐지된 반면, 국회의 대통령 탄핵권은 명문화되었다. 대통령은 법률안 거부권, 비상계엄 선포권 외에 국회에 대한 대응·견제 수단이 없어진 것이다. 이로써 특정 정당이 국회 과반 의석 이상을 장악할 경우 한국은 입법 독재로 전락할 위험성이 상존하게 되었다. 오늘과 같은 혼란 정국은 6공 헌법이 낳은 사생아나 다름없다.

역사를 통해 본 정변·쿠데타에서는 명분이나 대의가 중요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의 뜻을 관철시킬 수 있는 무력 수단과 동조 세력의 확보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희생을 각오하고 국가를 살리기 위한 지도자의 결연한 의지다. 아무리 급하고 바빠도 역사에서 배울 것은 배워야 한다.

펜앤드마이크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