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미영의 예술기행] 핀란드 헬싱키

입력 2024-11-27 14:30:00 수정 2024-11-27 18:54:04

자신의 역사 가져보지 못했던 나라…행복지수 1위 국가로 탈바꿈
무민과 산타클로스의 고향…섬유·가구·건축 아름다운 디자인 유명
용기와 결단력 뜻하는 '시수(Sisu)'…험난한 역사 속 핀란드인 드러내

세계에서 북극에 가장 가까운 핀란드 수도 헬싱키 시가지 모습 뒷편으로 우뚝솟은 헬싱키 대성당이 보인다.
세계에서 북극에 가장 가까운 핀란드 수도 헬싱키 시가지 모습 뒷편으로 우뚝솟은 헬싱키 대성당이 보인다.

한때 전생(前生)에 핀란드 사람이었을 거라 생각했던 적이 있다. 시벨리우스의 핀란디아 때문이었다. 교향곡은 서주(序奏)부터 장중하기 짝이 없는 금관악기 음율과 뒤이은 바이얼린들, 첼로와 팀파니, 베이스드럼, 심벌즈, 콘트라베이스가 점점 격렬해지는 연주를 들으며 어두운 객석에서 혼자 울었던 기억 때문이다.

20대 초반의 어느 날이었을 것이다. 동행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아 짐짓 태연한 척했지만 그때부터 핀란드는 늘 마음에서 애틋했다. 상트페테르부르그 끝자락 어디에선가 저 바다 너머 땅이 핀란드라고 누가 가리켰을 때 가슴이 쿵쾅 뛰던 기억이 난다.

'아, 핀란드여, 보라./ 이제 밤의 위협은 저 멀리 물러났다./ 찬란한 아침에, 종달새는 다시 영광의 노래를 부르고,/ 천국의 대기가 충만하였다./ 어둠의 힘은 사라지고 아침 햇살은 지금 승리하였으니,/ 너의 날이 다가왔다, 오 조국이여.' 이후 시인 코스켄니에미가 교향곡에 이 시를 붙여 찬가로 제2의 핀란드국가가 되었다.

헬싱키대성당과 시가지 모습
헬싱키대성당과 시가지 모습

◆북극에 가장 가까운 핀란드 수도 헬싱키

세계에서 북극에 가장 가까운 핀란드 수도 헬싱키는 북위 60도선임에도 우리나라보다 온화하다. 하지만 영하 35도 강추위도 가끔 찾아온다고. 헬싱키가 핀란드 최남단이니 라플란드 등 북쪽은 아마도 그 추위가 어마어마할 것이다. 그래서 핀란드의 백야는 더욱더 아름답다.

가끔 여행지에서 혼자 벗어나 적당한 해방감과 자유 그리고 적당한 쓸쓸함을 느끼고 싶을 때가 있다. 탈린에서 발트해를 건널 때가 그랬다. 실자라인 쾌속선 보딩을 한 후 나는 재빨리 선미(船尾)의 텅 빈 카페테리아 통유리창 앞 장의자로 갔다. 아침 첫 배의 적당한 서늘함에 어제의 옅은 페스트푸드 냄새가 떠돌았다.

바깥 검푸른 파도와 흰 포말이 적당히 쓸쓸해서 좋았다. 떠나온 곳에서 나른한 오후를 보내고 있을 친구에게 그 사진들을 찰칵 찍어서 보낸다.두 시간 남짓 만에 도착한 헬싱키 크루즈 터미널에서 카우파토리(Kauppatori, 마켓광장)는 바로 한 블록 건너 있었다. 원로원광장과 함께 헬싱키의 랜드마크로 화면에서 본 그대로 차양이 알록달록하다.

일행들과 까르륵대며 체리와 블루베리를 사고 여기서 꼭 먹어봐야한다는 작은 생선튀김 무이꾸(Muikut)를 먹었는데 맛은 글쎄, 마켓 건너 시청사와 대통령궁도 있는데 가끔 수행원 없이 혼자 때론 외국의 국가원수들과도 불쑥 무이꾸를 먹으러 대통령이 들르기도 한다고.

헬싱키대성당
헬싱키대성당

◆가장 행복지수가 높은 잘 사는 복지국가

중앙아시아와 우랄산맥 부근에서 8세기경 에스토니아를 거쳐 이주해왔다는 핀(Fin, 수렵채집인)족이 대다수인 핀란드는 시벨리우스의 곡에 붙인 교향시가 딱 들어맞는 파란만장, 신산하기 짝이 없는 역사를 가졌다.

650여 년의 스웨덴 지배, 100여 년의 러시아 지배 그리고 제2차세계대전 독일, 소련 양측과의 어정쩡한 협력과 치열한 쌍방전투, 겨울전쟁, 연속전쟁, 추축국으로서 소련에 대한 6억달러 전쟁 배상금, 말 그대로 강대국 틈바구니에서 치일대로 치인 '거의 자신의 역사를 가져보지 못 한' 나라였다. 물론 현재는 세계에서 가장 행복지수가 높은 잘 사는 복지국가 중 하나다.

헬싱키에서 가장 오래된 지역은 헬싱키대학교와 대성당 그리고 정부청사가 있는 원로원 광장(Senaatintori)이다. 신고전주의 건축 양식의 대성당은 원래 러시아 지배기인 1852년 성 니콜라우스 성당으로 지어졌는데 독립 후 루터교 대성당으로 바뀌었다. 광장에는 러시아 알렉산더2세의 동상이 서 있다.

식민지였으나 원로원을 구성해 자치권을 증대시키고 핀란드어 사용을 허락했고 원래 수도였던 투르쿠 대화재 이후 헬싱키를 계획도시로 만든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마켓광장의 '짜리나의 돌' 오벨리스크도 니콜라이1세 왕비 방문 기념비였다.

토베 얀손의 무민 캐릭터
토베 얀손의 무민 캐릭터

광장의 계단에 헬싱키대학 학생들이 시험을 치른 뒤 파티가 있는지 단과별 바지를 맞춰 입고 끝없이 모이기 시작했다. 해맑은 웃음들, 젊음이 역시 꽃이다. 토베 얀손의 무민(Muumi, 거대한 트롤을 하마처럼 토실토실한 이미지로 얀손이 창조해 낸 캐릭터)을 보며 산타클로스의 종주국이며 라플란드 산타마을 얘기를 들으며 자랐을 것이다.

우스펜스키 대성당은 러시아정교회당으로 역시 내부가 화려하다.
우스펜스키 대성당은 러시아정교회당으로 역시 내부가 화려하다.

◆세계 최강 디자인 국가

그 조기교육 때문일까. 핀란드는 '세계 최강 디자인 국가'로 꼽히고 있다. 만헤르헤임 거리엔 사양산업이던 섬유에 디자인을 입혀 명품으로 만든 마리메꼬, 알바 알토의 이딸라 공예품과 파이미오 의자 등 독특하고 아름다운 디자인 명품들이 즐비해 눈이 황홀하다. 세계 최초 위성통화에 성공한 노키아는 1865년 설립시엔 나무를 가공해 전봇대를 만들어 팔던 회사였고, 자작나무에서 자일리톨을 만들어 낸 것도 핀란드인이다.

우스펜스키 대성당은 러시아정교회당으로 역시 내부가 화려하다. 의자 없이 검은 머릿수건을 쓴 할머니가 바닥에 엎드려 기도를 하고 있던 어느 정교회당 정경이 또 떠올라 코끝이 찡해진다. 1945년 시벨리우스에게 헌정된 공원은 공사 중이어서 들어가질 못했다. 조각가 에일라 힐투넨이 파이프 오르간 형태로 만든 작품 '음악의 열정(Passio Musicae)'은 거대한 투명 가림막에 쌓인 것을 지나가며 일별했다.

그의 흉상도 저 안쪽 어딘가 있을 텐데. 노아의 방주를 연상케 하는 캄피 고요의 교회와 바로 그 옆 현대미술관(Amos Rex)은 역시 버스를 타고 지나가며 볼 수밖에 없었다. 패키지여행은 이렇게 정해진 대로 묵묵히 다니는 것이 참 좋은데 늘 내가 기획해서 다니던 여행의 습성이 한숨이 되어 절로 흘러나온다.

거대한 바위를 깎아 만든 템펠리아우키오 교회
거대한 바위를 깎아 만든 템펠리아우키오 교회

거대한 바위를 깎아 만든 템펠리아우키오 교회(Temppeliaukio Church, 암석교회)는 원형유리로 새어드는 자연채광이 신비로워 한참 앉아 있었다. 파이프 오르간은 바위의 선을 따라 설계한 듯 했고 반원형 제단과 의자들마저 영성이 충만해보인다. 1960년 건축가 겸 가구 디자이너인 티모(Timo)와 투오모 수오말라이넨(Tuomo Suomalainen) 형제가 만들었다는데 이끼가 내벽에 성스럽게 돋아 있다. '극한 기후와 화염포로 인한 타격으로부터 교회를 보존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란 브로셔의 설명이 슬프다.

헬싱키 인근 작은 섬이 동화처럼 보인다.핀란드에는 19만 개가 넘는 호수가 있다.
헬싱키 인근 작은 섬이 동화처럼 보인다.핀란드에는 19만 개가 넘는 호수가 있다.

◆현재를 충실히 살라

핀란드에는 단순번역이 불가능한 시수(Sisu)라는 말이 있다. '주먹을 꽉 쥔 듯한 용기와 상상을 초월한 결단력'을 뜻하는 말이라고 한다. 역사적으로 핀란드인들은 강인함과 용기가 누구보다 더 필요했을 것이다. 우리의 '은근과 끈기'도 그 맥락일 터. 이러한 말도 덧붙는다.

'시수는 모든 희망이 사라지면 그 모습을 드러낸다.' 가끔 헬싱키가 볼 것이 너무 없다는 말들을 한다.(실제론 아주 많다.) 근대의 수많은 전쟁으로 나라가 초토화가 되어 본 사람들은 그 말이 무엇인지 안다. 백 년 이상 된 건물이 많이 없고, 이렇게 신을 찾고 기도를 하는 곳이 도시 곳곳에 많은 이유일 것이다.

핀란드에는 19만 개가 넘는 호수가 있고 사우나도 국민 두 명당 한 개꼴이다. 호수를 뜻하는 수오(Suo)를 따 스스로 수오미(Suomi)라 칭하는 그들의 휘바(Hyvaa, 좋다, 잘한다라는 뜻)는 단순 범박한 일상에 있는 듯하다. 핀란드어에 미래형이 없다는 말도 문득 이해된다.

'현재를 충실히 살라.' 그들이 체득한 진리일 것이다. 세우라사리숲의 바퀴 달린 나무집과 범박한 보트 그리고 풀숲의 열매들과 백조들… 이러한 고요와 평온이 그들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이의 휘바 아니던가. 팬데믹 이전을 지금 우리가 얼마나 그리워하는가. 아, 내 전생이 혹시 핀란드인이 아닐까 생각하며 영화 '카모메 식당'을 몇 번이나 되돌려보던 그때가 정말 그립다.

박미영 시인, 대구문학관 기획실장
박미영 시인, 대구문학관 기획실장

박미영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