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과 전망-최경철] K 제조업에는 호암과 청암의 DNA가 흐른다

입력 2024-11-24 18:08:05 수정 2024-11-24 19:25:31

최경철 편집국 부국장 겸 동부지역취재본부장
최경철 편집국 부국장 겸 동부지역취재본부장

삼성전자는 세계가 알아주는 글로벌 기업이지만 시작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일본 경제신문 서울 특파원으로 삼성 창업주 호암(湖巖) 이병철 회장과 오랜 교분을 쌓았던 야마자키 가스히코의 회고에 따르면 1969년 삼성전자공업으로 첫발을 내디딘 삼성전자는 경기도 수원에 있던 단층 건물 달랑 한 동이 제조시설의 전부였고, 일본에서 수입한 부품을 조립해 흑백 TV와 선풍기 등을 만들었다. 삼성에 기술적 도움을 많이 줬던 일본 산요전기 이우에 사토시 회장이 삼성전자 창업 초기 어느 날 수원 공장에 초대받아 갔다. 그런데 호암이 공장 한쪽 마루 밑을 보라고 하기에 잘 살펴보니 큼지막한 독이 가득 들어 있었다. 전국 각지에서 온 근로자들이 김치가 없으면 밥맛을 잃으니 호암이 직접 지시해 김칫독을 묻었다는 것이다. 이우에 회장은 탄복을 했다.

삼성전자는 창업한 지 몇 년도 지나지 않은 1975년, 전원을 켜면 예열 없이 화면이 바로 켜지는 '순간수상(瞬間受像)' 방식 브라운관을 채택한 절전형 제품인 흑백 이코노 TV를 개발, 시판하면서 단숨에 국내 TV 시장 점유율 1위를 달성했다. 여세를 몰아 국내 최초로 컬러 TV 개발·생산에 성공한 뒤 세계 최대 시장인 미국에 진출했고, 삼성전자 이름을 세계에 알렸다. 호암은 시기상조라는 주위의 반대를 뿌리치고 1983년 반도체 산업 진출을 선언한 뒤 그해 64K D램을 내놓으면서 삼성의 반도체 신화까지 쏘아 올렸다.

호암처럼 맨손 기적을 이뤄냈던 청암(靑巖) 박태준 회장도 포항제철소를 만드는 과정에서 직원들을 맨앞에 뒀고, 이를 통해 제철보국(製鐵報國)의 신화를 썼다. 자원이 없지만 똑똑한 인재가 많다는 점을 잘 아는 청암은 '사람의 힘'을 경영 중심에 뒀다. 1968년 창업 직후 돈이 모자라 월급 줄 돈도 없는 곤란한 지경에 여러 차례 처했다. 하지만 청암은 1971년 보험회사가 주던 리베이트로 직원 장학재단을 설립했다. 당시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직원들의 안정된 생활 터전 마련이 곧 생산성 증대로 이어져 세계 최고가 될 수 있다는 게 청암의 판단이었다. "부하는 앉아서 쉬고 리더는 서서 쉬어라." 청암이 부르짖었던 솔선수범(率先垂範)의 리더십 철학이었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청암의 포항제철소는 고로 제1기를 준공한 1973년부터 흑자 행진을 시작했다. 세계 최단기간에 가장 저렴한 비용으로 포항 고로 1기를 만든 이래 세계 철강산업 역사상 유례없는 고도 성장을 지속했고 글로벌 포스코 브랜드로 발돋움했다.

최근 여러 기업인들을 만나면서 한결같이 "어렵다" "힘들다"라는 말을 들었다. 철강 경기가 몹시 나쁜 포항의 경제인들 경우, 앞이 캄캄하다는 하소연도 내놨다. 비관론이 난무했지만 어느 기업인은 "언제 우리가 안 어려웠던 적이 있었습니까"라고 되물었다. 이 반문을 들은 기자는 호암과 청암을 떠올렸고 이들을 호명하고 싶었다. 아무것도 없었던 이 땅에 K 제조업 신화의 토양을 만들었던 그들은 빈손이어도, 맨손이어도, 사람만 있으면 무엇이든 가능하다고 믿었고 이를 증명했다.

기업 경기가 처참(悽慘)한 지경이라고 한다.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대기업이 유동성 위기를 겪는다는 흉흉한 소문까지 나돈다. 국민 복리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는 정치에 실망한 국민들은 늘 그랬듯이 기업밖에 믿을 게 없다. K 제조업은 국민들의 믿음을 결코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K 제조업에는 호암과 청암 같은 위대한 창업가 DNA가 계승되고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