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목의 철학이야기] '달게 받아들일' 용기

입력 2024-11-21 13:35:47

최재목 영남대 철학과 교수

최재목 영남대 철학과 교수
최재목 영남대 철학과 교수

오래전부터 혼자 가끔 떠올리는 시가 있다. 한용운의 '나의 길'이다.

"이 세상에는 길도 많기도 합니다./산에는 돌길이 있습니다. 바다에는 뱃길이 있습니다./ 공중에는 달과 별의 길이 있습니다./…/악한 사람은 죄의 길을 좇아갑니다. 의(義) 있는 사람은 옳은 일을 위하여는 칼날을 밟습니다."

평생 악을 저지르며 사는 사람의 길도, 평생 의롭게 사는 사람의 길도, 해와 달과 별의 길도 다 길이다. 목적이 있든 없든, 누구나 길을 걷는다.

걸어갈 길은 설렘이나 희망일지 모르나, 이미 걸어온 길은 어쩔 수 없는 업보이고 운명이다.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 없는 이 발길…." 엄지발가락과 뒤꿈치에 힘을 주고, 몸무게를 잔뜩 실어 디뎠던 신발의 흔적이 바로 '이력' 아닌가. 때론 방향을 바꾸거나 때론 머뭇거리는 사이사이에, 갈 수 있는 길도 가지 못하는 길도 생겨난다.

길에는 '도로'처럼 보이는 것도, '옳은 길'처럼 보이지 않는 것도 있다. 이런 구상의 길과 추상의 길은 수시로 뒤섞이고 헷갈리며 삶을 일궈 간다. 그러니 걷는 길의 방향과 거리, 의미와 내용이 사람마다 각기 다를 수밖에 없다.

어느 한 사람이 경험한 길은 그대로 하나의 '세계'이다. 사람 수만큼의 각양각색의 세계가 이 지상에 동시적으로 존재한다는 말도 된다. 프루스트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말한 것처럼, "세계는 모든 인간에게 참되지만 동시에 모든 인간마다 다르다." 그렇다. "사실은 단 하나의 세계가 아니라, 몇백만의 세계, 인간의 눈동자 및 지성과 거의 동수인 세계가 있고, 그것이 아침마다 깨어난다."

그러나 아무리 걸어도 각자의 힘으로 '할 수 있었던 것'이 있고, '할 수 없었던 것'이 있다. "내 뜻대로 돼!"라는 자유의지의 길도, "될 대로 돼!"라는 운명애의 길도 있다. 전자는 '스스로'라는 진보를 믿고, 후자는 '저절로'라는 순리를 믿는다. 생각의 반쪽은 꿈을 꾸며 하늘에 걸려 있고, 다른 반쪽은 현실에 묶여 땅을 디디고 서 있다.

둘은 반대되면서, '나'라는 한 몸에서 일치한다. 이 반대의 일치는 '스스로 한다'라는 '능동적, 자력적, 개체적'인 자각을 가져오고, '저절로 된다'라는 '수동적, 타력적, 전체적'인 자각을 일깨운다. 삶의 길이 꽃 천지였으면 하고 바라겠으나, 끊임없는 풍진과 근심 속에 내던져지기 일쑤다.

개체는 전체적 생명의 흐름과 함께한다. 스스로 '살아있다'고들 하나 운 좋게 '살려지고' 있을 뿐. 그저 이런저런 수많은 조건에 의해 절로 절로 잘 굴러가는 것이다. 추락하고 만발하는 게 다 그렇다. "산 절로 절로, 수 절로 절로, 그사이에 나도 절로 절로" 묻혀 흘러갈 뿐이다. 어쨌거나 될 건 되고, 안 될 건 안 된다. 그래야 맞다.

경비행기를 몰고 어느 산맥을 넘을 때, 난기류를 만나 죽을 고비를 넘긴 생텍쥐페리는 이렇게 술회한다. "나는 그 산마루와 그 공간을 존경했다. 내가 가고 있는 골짜기에 입을 딱 벌리고, 나를 실어 가는 바람의 흐름에다 또 하나의 다른 흐름을 뒤섞어서, 상상도 못 할 소용돌이를 일으키려고 기다리고 있는, 비스듬히 엇갈린 그 계곡을 존경했다." 조종사가 겪는 자연의 힘, 그 불가항력에 대해 존경심이 '저절로' 터져 나온 것이다. 슈바이처가 생명계에 대해 진심으로 존중하고 두려워하며 느낀 '외경심'과 같은 것이리라. 개체는 자유라고 생각하나 세상 만물은 어떤 전체적인 힘을 바탕으로 상호 의존하는 묘한 관계에 있다.

생로병사, 흥망성쇠, 춘하추동…의 변화를 보라. '나'라는 개체가 '생각하고,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생각나야' 생각하고 '살려져야' 살아간다. 이런 대목에 서면, 정신분석학자 라캉의 말이 잘 들린다. "나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한다."

다들 제 잘난 맛으로 산다. 목에 힘주며 소리를 높일 대로 높여댄다. 그러다 호되게 한번 자빠지고 엎어지면 제 맘대로 사는 게 아님을 체감한다. 스스로라는 '자유・의지'와 저절로라는 '순리・자재', 이 둘의 순수한 모순을 생각하면 삶의 반은 웃음이고, 그 나머지 반은 눈물인 게 이상하지 않다. 한편으론 무덤덤하고, 한편으론 경이로울 따름이다.

스스로라 하지만 눈 크게 뜨고 보면, '저절로'라는 어쩔 수 없음, 즉 '부득이함'에 붙들려 삶이 굴러가고 있다. 이 부득이함 앞에선 누구나 평등하다. 따라서 어떤 상황과 처지를 달게 받아들이는 '감수'(甘受)의 마음가짐을 되돌아본다.

기대는 삐걱대며 어긋날 수 있고, 믿음은 산산이 조각날 수 있다. 그럼에도 좋은 일은 늘 내 것인 양 기뻐하고 좋지 않은 일은 늘 남 탓으로 돌린다. 우리 사회의 얄궂은 심보다. 거리는 온통 남 탓으로 넘쳐난다. 선전・선동의 구호는 대개 저쪽의 남을 끌어내리려는 것이다. 꼴값을 떨지만, 누가 언제 역사의 뒤 안으로 사라질지는 두고 볼 일이다.

자신의 고난을 사랑할 줄 알고, 스스로 처한 허탈한 운명마저 달게 받아들이는 힘은 어디서 오는가. 아무것도 없는 맹탕・허탕의 시간과 무의미함에 편안할 수 있는 마음, 자신을 사랑하고 용서할 줄 아는 용기가 아닐까. 스스로와 저절로라는 순수한 모순 사이에서 '달게 받아들일 용기'를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