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가 나를 무죄로 하리라." 쿠바의 독재자 피델 카스트로의 말이다. 1953년 풀헨시오 바티스타 독재 정권을 전복(顚覆)하려 몬테카를로 병영을 습격했다 체포돼 15년 형을 선고받은 법정 최후 진술에서 그렇게 말했다. 이후 카스트로가 역사를 만듦으로서 그 말은 실현됐다. 그 역사란 폭력 혁명과 독재정권 수립이다. 그런 점에서 카스트로를 무죄로 만든 것은 역사가 아니라 카스트로 자신이었다고 할 수 있다.
어쨌든 카스트로의 이 말은 비장미(悲壯美)가 넘친다. 지금 불의(不義)한 현실의 법정에서는 유죄이지만 정의가 살아 숨 쉴 훗날에는 반드시 무죄가 될 것이며 그날이 올 때까지 투쟁을 멈추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묻어 난다. 이렇게 '폼'이 나서인지 '현실의 법정'에서 유죄를 선고받은 국내 좌파들은 이 말을 다양하게 변형해 즐겨 차용한다.
전형적인 사례가 국무총리를 지낸 한명숙이다. 그는 2007년 불법 정치자금 9억원을 받은 혐의로 기소돼 2015년 대법원에서 징역 2년 형의 확정 판결을 받고 만기 복역했다. 그는 대법원 판결 후 "역사와 양심의 법정에서는 나는 무죄"라고 했다. 당시 새정치연합 문재인 대표는 "한 총리가 역사와 양심의 법정에서 무죄임을 확신한다"며 이를 거들었다. 한명숙은 수감 직전에는 오른손에 성경, 왼손에 순결을 상징하는 백합을 들고 구치소 앞에 나타나 역시 "결백하다"고 했다. 2021년에도 자서전 '한명숙의 진실: 나는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다'에서 "난 결백하다. 그것은 진실이다. 거짓은 진실을 이길 수 없다"고 했다. '희생자 코스프레' '자서전 감성팔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경남지사를 지낸 김경수가 대선 여론 조작 혐의로 2021년 대법원에서 징역 2년 확정 판결을 받았을 때도 같은 소리가 쏟아졌다. 그가 "법원을 통한 진실 찾기는 더 이상 진행할 방법이 없어졌다. 진실은 아무리 멀리 던져도 반드시 제자리로 돌아온다는 믿음을 끝까지 놓지 않겠다"며 대법원 판결을 비난했다. 이에 당시 친문 홍영표 의원은 "김경수 지사의 결백을 확신한다"며 "대법원이 눈감은 진실이 양심과 역사의 법정에서는 반드시 밝혀질 것"이라고 했다.
2010년 서울시교육감 선거 과정에서 자신이 속한 진보 진영 경쟁 후보에게 2억원을 건네 매수한 혐의로 대법원에서 징역 1년 형을 확정받고 10개월가량 복역한 곽노현 전 서울시교육감도 한통속이다. 재판에서 "진실이 오해보다 강하고 선의가 범의(犯意)보다 강하다는 것이 드러나리라 확신한다"고 했다. 상대 후보에게 돈을 준 것이 '매수'가 아니라 '선의(善意)의 지원'이라는 것이다. 지난 9월 재출마를 선언하면서는 "대법원 판결이 다 옳은 건 아니다. 제 양심의 법정에서 당당하고 떳떳하다"고 했다.
이런 '역사와 양심의 법정' 타령은 억누를 수 없는 궁금증을 낳는다. 첫째 현실의 법정과 역사와 양심의 법정은 무엇이 다르고 그 차이는 무엇인가이다. 현실의 법정에서 유죄라도 양심과 역사의 법정에서는 무조건 무죄란 것인가? 둘째 정말로 결백하다면 언제 열릴지 기약(期約) 없는, 아니 열릴지조차 알 수 없는 '역사와 양심의 법정'을 무작정 기다릴 게 아니라 당장 재심을 청구해야 한다. 그게 해원(解冤)의 가장 빠른 길인데 왜 그렇게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 1심에서 징역 1년에 집행 유예 2년을 선고받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도 '양심의 법정 타령' 역사에 한 페이지를 기록했다. 그는 선고 직후 "현실의 법정은 아직 두 번 더 남아 있고 민심과 역사의 법정은 영원하다"고 했다. 2심과 대법원 상고심에서 1심 선고가 뒤집어지기 어려울 것이란 불안감이 읽힌다.
이 대표는 경기지사 때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기소돼 2심에서 당선무효형을 받았으나 대법원에서 기적처럼 무죄가 됐다. 'TV 토론에서 돌발적 질문에 대한 답변은 거짓으로만 단정 지을 수 없다'는 권순일 당시 대법관의 희한한 논리 덕분이었다. 그 이면에는 김만배를 통한 '재판 거래' 의혹이 있다. '조희대 대법원'에서도 이런 거래가 가능할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1심 선고가 2, 3심에서 뒤집어질 가능성도 낮을 것이다. 이 대표도 명색이 변호사 출신인 만큼 이를 모르지 않을 것이다. '민심과 역사의 법정은 영원하다'는 말이 이런 깨달음의 표현이라면 기자의 상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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