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원의 기록여행] 김장철 채소밭 모리배

입력 2024-11-14 14:30:00 수정 2024-11-14 17:35:23

매일신문 전신 남선경제신문 1947년 11월 19일 자
매일신문 전신 남선경제신문 1947년 11월 19일 자

'금년의 숙제꺼리~ 최근 자유시장의 무, 배추 등의 가격이 지난달보다도 날로 고가로 거래되고 있는 주인(主因)을 구명하여 보면 대부분이 철도 혹은 추럭 등으로 지방 반출이 성행되고 있는 관계도 있겠지만 크게 주목할 만한 사실은 이중삼중으로 손을 거치고 있는 현지의 채전 모리배를 취체 하지 않는 이상 부민은 김장난을 맛보지 않을 수 없는 현상을 역력히 짐작할 수 있다.' (매일신문 전신 남선경제신문 1947년 11월 19일 자)

먹거리가 아쉬웠던 그 시절 김치는 겨우내 때마다 밥상에 오르는 메뉴였다. 그래서인지 김장은 겨울철 반년 양식으로 불렸다. 종류도 배추김치와 깍두기, 동치미 등으로 다양했다. 김장은 찬 바람이 부는 동짓달이 시작되면 장작과 함께 월동 준비의 가늠자가 되었다. 등을 따습게 하는 데는 장작이 필요했고 배를 부르게 하는 데는 쌀과 함께 김치가 있었다. 쌀은 사시사철 식량이었지만 김장은 엄동설한에 없어서는 안 되는 겨울철 양식이었다.

김장이 겨울을 앞두고 숙제로 다가왔다. 왜 그랬을까. 김장은 겨울이 시작된다는 입동 전후에 많이 했다. 날짜로는 11월 7~8일 정도로 늦어도 동짓달 중순이 지나면 대부분 가정은 김장을 끝냈다. 매서운 추위가 몰아치기 전에 겨우살이 준비를 해두려는 의도였다. 너도나도 같은 시기에 김치를 담다 보니 김장철 무와 배추값은 평상시보다 비쌌다. 이 때문에 값이 내리기를 기다렸다가 섣달에야 김장하는 일도 있었다. 김장 숙제가 늦어진 것이다.

해방 이태 뒤 김장철이 시작되는 시점에 배추는 한 포기에 30~40원, 무는 한 속에 30원대를 오르내렸다. 한해 전 10원가량이었던 배추 가격보다 크게 올랐다. 무는 일제가 물러난 뒤 재배량이 오히려 줄었다. 배추와 무 작황이 좋지 않아 더 오를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김장을 책임져야 하는 주부들은 걱정이 태산이었다. 하지만 실제 수확은 달랐다. 대구부 당국은 작년보다 3할 이상의 소채 생산이 많다고 발표했다.

농작물 가격의 폭등은 수해나 한해 못지않게 반출‧반입의 불균형이 꼽혔다. 가령 대구부의 농산물을 타지방으로 내다 팔면 물량 부족을 겪게 되므로 사전에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부족한 식량 반출을 막기 위해 도로를 통제하기도 했다. 연료 부족으로 철도 운행이 줄거나 중단되면 일상용품의 유통마저 어려워 물가 인상으로 이어졌다. 김장철에 소금 공급을 위해 미군 당국이 트럭 15대를 동원한 것도 같은 이유였다.

김장철에 배추와 무값이 갑자기 떨어졌다. 배추는 평균 10원 안팎으로 내려 품질이 좋은 상품도 20원대로 급락했다. 무는 한 가마니 750원으로 한 개에 7원~10원까지 내렸다. 가격이 비싸지면 물량이 늘어나는 경우는 흔히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때는 달랐다. 날씨 때문이었다. 한파가 몰아 치자 무와 배추가 쏟아져나왔다. 김장밭을 통째로 사서 값이 오르기를 기다리던 상인들이 두 손을 든 것이었다. 기온이 떨어져 채소가 얼면 팔리지 않고 팔리더라도 손해를 볼 수 있어 허겁지겁 배추와 무를 내놓았다.

채전 모리배로 불린 이들은 채소밭 모리배였다. 밭떼기 거래로 배추와 무 가격을 올린 뒤 팔아 이익을 챙겼다. 해방 이후에도 모리배는 여기저기서 활개 쳤다. 쌀이나 의료품, 생활필수품 등을 매점매석해 폭리를 취했다. 이익이 생기는 일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배추와 무밭도 그냥 넘어갈 리 없었다. 오죽했으면 모리배는 일본 순사 출신의 경찰과 같은 반열로 민중들의 분노 대상이 되었을까.

김장은 고추와 마늘, 생강, 새우젓, 조개젓 등의 온갖 양념이 필요했다. 구색에 맞춘 김장을 하면 식구 한 명당 평균 1천 원이 들어 봉급쟁이 한 달 월급을 거뜬히 넘겼다. 소금은 돈이 있어나 마나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국내 염전의 생산이 적어 1947년에는 미국서 5만 톤을 들여왔고 중국에서도 수입했다. 전매국은 김장용으로 한 사람당 다섯 되를 나눠주다 돈을 받고 배급을 늘렸다. 김장독도 대용량은 700원에 이를 정도로 가격이 만만찮았다.

김장밭을 밭떼기로 거머쥔 모리배들은 자신의 배를 채우고 농민과 서민에게 고통을 건넸다. 김장 시즌은 예전 같지 않아도 서민의 김장값 부담은 어찌 낯설지 않다. 겨우내 반양식이 아닌 것만 빼고.

박창원
박창원

박창원 경북대 역사문화아카이브연구센터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