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정일 경북대 교수회 의장
한국은행과 KDI(한국개발연구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권위가 있는 경제 '싱크탱크'(think tank)다. 이들 기관은 경제성장률, 무역수지, 환율 등을 예측한다. 한국은행에는 금융통화위원회가 있고, KDI는 기획재정부가 출연(出捐)한 기관이다.
한국은행은 통화정책이, KDI는 재정정책이 주된 업무다. 이 두 기관은 예산과 인력에서 다른 경제연구소를 압도한다. 전경련, 대한상의, 시중은행, 대기업에도 경제연구소가 있지만 이들은 주인이 있는 기관이다. 아무래도 객관적이지 않다.
지난 5월 한국은행은 올해 경제성장률을 2.1%에서 2.5%로 수정 예측했으나 2분기 성장률은 –0.2%에 그쳤다. 8월에도 한국은행은 3분기 성장률을 0.5%로 예측했으나 실제 성장률은 0.1%였다. 사정이 이런데 한국은행은 뜬금없이 '지역별 비례선발제'를 제안했다. 명문 대학 입학정원을 지역별로 할당하자는 얘기다. 한국은행은 서울과 비서울 간 서울대 진학률 격차 중 92%가 '거주 지역 효과' 때문이라는 연구 결과를 내놨다.
한국은행 총재는 한 발 더 나갔다. "대치동 학원들이 전국적으로 분산되고 지방의 중·고등학생이 서울로 이주할 필요가 없어지면, 한국은행이 금리를 조정하는 것보다 수도권 부동산 가격을 더 효과적으로 안정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한국은행 총재는 목사나 신부가 아니다. 한국은행 총재는 이 말도 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자꾸 금리를 내리라고 하지 말라."
기획재정부 국정감사에서 경제부총리가 사과했다. 지난 4년간 세수(稅收) 예측에 오류가 있어서다. 올해 세수는 예측치보다 30조원 적다고 한다. 올해 예산이 367조원이니 8%나 잘못 예측했다. 경제부총리는 내년 세수 예측치는 KDI와 숫자를 맞춰 봤다고 했다. 내년에는 불확실성이 크지 않다는 말도 덧붙였다. 행동이 바뀌지 않으면 결과가 달라지지 않는다.
이 와중에 KDI가 올해 경제성장률을 2.6%에서 2.5%로 수정 예측하면서 슬쩍 금리 인하를 주장했다. 높은 금리가 내수(內需) 부진(不振)을 유발해서 경제성장률이 떨어졌다는 논리다. KDI는 소비증가율을 1.8%에서 1.5%로, 투자증가율은 2.2%에서 0.4%로 낮췄다. 다음과 같은 경고도 잊지 않았다. "금리가 1%포인트 인상되면 9개월 후부터 소비가 최대 0.7%포인트 감소하고, 그 영향이 27개월 후까지 지속된다."
한국은행이 경제성장률을 제대로 예측하지 못하고, KDI의 세수 추계(推計)가 틀린 것은 사소(些少)한 일이 아니다. 두 기관은 대내외 환경의 급격한 변화 탓을 했다. 우리나라와 같은 '소규모 개방경제'는 늘 환경이 급변한다. 그렇다면 한국은행과 KDI의 무능력 때문인가? 두 기관이 갑자기 무능해질 수는 없다. 그래서 합리적인 의심이 생긴다. '미필적 고의'가 아닐까?
한국은행과 KDI의 오류에는 패턴(pattern)이 있다. 한국은행이 예측한 경제성장률은 실제 성장률보다 높다. KDI가 추계한 세수는 실제 세수보다 많다. 정부에 유리한 방향으로 오류가 발생했다. 진짜 오류는 '랜덤'(random)이다. 패턴이 없어야 한다. 대체로 경제 예측은 보수적이다. 경제성장률을 3%로 예측했는데 실제로 4% 성장했다고 해서 분노할 국민은 없기 때문이다. 한국은행과 KDI의 오류는 여기에도 반(反)한다.
백번을 양보해서 한국은행과 KDI가 실수했다고 치자. 실수가 잦으면 실력이다. 실력이 없으면 노력이라도 해야 한다. 경제성장률 예측과 세수 추계 모형에 문제가 있으면 예산을 더 쓰고 인력을 늘려야 한다. 하지만 한국은행은 '지역별 비례선발제'를 들고나왔다. KDI는 금리 인하를 주장하고 나섰다. 다들 왜 이러나? '봉숭아 학당'이 따로 없다.
이번 달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0.25%포인트 내렸다. 지난달 미국 연준이 기준금리를 0.5%포인트 내렸기 때문이다. 미국 연준이 한국은행의 숨통을 터줬다. 미국 연준이 기준금리를 0.25%포인트 내렸다면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내렸을까?
올해 1~8월 관리재정수지 적자가 84조원, 8월 기준 국가채무는 1천167조원이다. KDI는 침묵하고 있다. 무분별한 감세(減稅), 방만한 정부 지출을 비판하지 않는다. 침묵이 금인가? 한국은행과 KDI는 본분(本分)에 충실해야 한다. 한국은행 총재와 KDI 원장은 정치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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