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 10월 1일 대구. 민중들이 거리에서 "쌀을 달라"고 외쳤다. 경찰과 시위대는 충돌했다. 경찰은 시위대를 향해 발포, 2명이 숨졌다. 다음 날 시위는 거세졌다. 미군정(美軍政)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시위대를 무력 진압했다. 분노의 횃불은 경북으로 번졌다. 당시 대구경북 인구 317만 명 중 77만 명이 시위에 참여했다는 기록이 있다. '대구 10월 항쟁(抗爭)'이다.
10월 항쟁의 원인은 미군정의 식량 강제 공출(供出)과 잔존한 친일 매국 세력의 횡포 때문이었다. 게다가 콜레라 확산으로 봉쇄된 대구에는 굶어 죽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미군정과 경찰은 이 사건을 '좌익 세력의 불순한 파괴적 정치활동에 선동돼 일반 시민들이 가담한 사건'으로 규정했다. 항쟁에 나선 사람들은 보도연맹(保導聯盟)에 강제 가입돼 사찰 대상이 됐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그들은 재판도 없이 집단 학살(虐殺)되기도 했다.
10월 항쟁은 오랜 세월 동안 묻혔다. 그것은 침묵과 망각의 대상이었다. 10월 항쟁이 '폭동'에서 '사건'을 거쳐 '항쟁'으로 호명(呼名)되기까지 시간은 더디고 더뎠다. 2010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화위)가 '사건'으로 명명했고, 2016년 8월 대구시의회는 '10월 항쟁 등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위령 사업 지원 등에 관한 조례'를 제정했다.
2022년 매일신문은 '대구 시월, 봉인된 역사를 풀다'란 제목으로 탐사보도를 했다. 10월 항쟁을 조명하는 기획이었다. 목격자와 유가족의 증언, 많은 기록과 연구 자료를 통해 참상(慘狀)을 다뤘다. 진상 규명과 피해자 명예 회복도 강조했다. 이 보도는 일경언론인상, 민주언론실천상, 대구경북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 등을 받았다.
최근 대구공고 학생들이 대구시 산격청사 앞에서 집회를 열고 '10월 항쟁 기념비 건립'을 촉구했다. 지난 1일 열린 10월 항쟁 위령제에서는 진화위가 10월 항쟁을 '10월 사건'으로 낮춰 불러 비판을 받았다. 1946년 대구의 10월과 1948년 제주, 여수·순천은 이념 갈등이 낳은 비극(悲劇)이다. 그러나 진상 규명과 역사적 평가는 하늘과 땅 차이다. 정부는 제주 4·3 사건과 여순 사건의 희생에 대해 공식 사과했다. 10월 항쟁도 그렇게 돼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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