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사 연구자
대나무와 돌을 그린 운미 민영익의 '죽석'이다. 민영익은 젊을 때부터 서예에 공을 들였고, 괴석과 묵란을 그렸지만 그가 자신의 운미란, 운미죽을 완성한 것은 상해에서다. 민영익이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재능이 뛰어났으며 15세 무렵부터 글씨를 잘 쓴다는 소문이 있었다고 황현의 '매천야록'에 전한다.
민영익은 아버지가 고종비 명성왕후 민씨의 사촌동생인 왕실 외척으로 태어나 16세 때 명성왕후 집안에 양자로 들어가 왕후의 친정집 제사를 모시게 된다. 민비의 오빠 민승호와 일가족이 반대 세력에 의한 폭발물 사고로 몰살당했기 때문이다. 섭정하던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물러나고 고종이 친정 체제를 확립한 1875년(고종 12)이었다.
민영익은 명성왕후의 총애를 받으며 민승호가 살던 이른바 죽동궁(竹洞宮)의 새 주인이 되었고 18세에 문과에 급제한다. 초고속 승진을 거듭해 19세에 조정의 인사권을 쥔 정3품 당상관인 이조참의가 되고 경리통리기무아문군무사당상, 군무변정기연사당상, 협판통리아문사무를 역임하며 20세에 인사권, 병권, 재정권, 외교권을 모두 장악한 '소년세도'의 권력을 누린다.
승승장구하던 민영익은 갑신정변으로 자객의 칼에 귀가 잘리고 목숨이 위태로운 상처를 입었으나 독일인 외교 고문 묄렌도르프의 도움과 미국인 의사 알렌의 치료로 생명을 건졌다. 아버지 민태호는 이때 살해당한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민영익은 홍콩, 상해, 마카오 등지를 왕래하며 중국에 자주 머물렀다. 그러다 을미사변(1895년)으로 최대 후원자인 명성왕후가 시해 당하자 정치에 미련을 접고 상해에 정착한다. 상해에서 민영익은 국내와 완전히 단절하고 그림과 글씨에 몰입하며 오창석, 포화 등 대가들과 교유했다. 민영익은 한국에서는 정치가였고 중국에선 서화가였다.
'죽석'은 담묵과 농묵의 이분법이 뚜렷해 단정하고 굳센 운미죽의 특징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죽간과 바위는 담묵이고 죽엽과 태점은 농묵이다. 먹색과 구도의 간소함은 규칙적이면서도 활발하게 삐쳐낸 댓잎과 분방한 필치의 바위 표현으로 상쇄시켰다. '천심죽재주인(千尋竹齋主人) 사(寫)'로 서명하고 오창석이 새긴 인장 '영익일리(泳翊日利)'를 찍었다.
천심죽재는 민영익이 중국인 부인, 아들과 살았던 상해의 집이다. '천심죽'은 두 가지로 해석된다. 심(尋)을 '팔척(八尺) 심'으로 보면 송나라 소식이 '천 길 높이의 대나무'에 빗댄 문인사대부의 기상을 의미하고, '찾을 심'으로 보면 서울 죽동궁을 천 번이나 찾아가고 싶은 심정을 담은 이름이 된다. 어느 쪽으로 해석하든 파란만장한 그의 삶에 애절한 마음이 든다. 민영익은 상해에 정착한 후 55세로 작고한 길지 않은 생애의 후반 20여 년 동안 한 번도 국내에 들어오지 않았다. 천심죽재는 당시 주소로 상해 북경로(北京路) 서강(瑞康) 766호였다.
미술사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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