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일 전 장안대 총장
10월이다. 가을을 이기는 여름은 없다. 산들바람이 볼을 스친다. 행복한 계절이다. 그러나 아름다운 10월은 가슴 아린 달이기도 하다. 1946년 이 즈음부터 한국전쟁 때까지 숫자도 모를 많은 사람들이 골로 갔다. 여기서 '골로 갔다'는 말은 '죽었다'는 뜻이다. 골짜기로 끌려가 죽었다고 해서 골로 갔다는 말이 쓰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청장년은 물론이고 노인, 어린이, 부녀자들도 골로 갔다.
이들이 골로 간 이유를 알려면 '1946년 10월'을 이해해야 한다. 1946년 10월 대구에서 미 군정에 대한 격렬한 저항운동이 일어났다. 이 저항운동은 그해 가을 전국으로 들불처럼 번져 나갔다. 저항운동은 규모, 범위, 치열함, 지속성에 있어서 대단한 것이었다. 방방곡곡에서 저항의 횃불이 타올랐다.
이 저항운동은 어떻게 일어나게 되었나? 한동안 우리는 이 일이 전위적 조직의 선동으로 비롯했다고 설명했다. '전위 조직'이 정치 이념으로 민중을 선동하고 동원하여 봉기를 일으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이런 설명에 한계가 있다는 주장이 나왔다. 전위 조직의 선동과 동원이라기보다 민중의 '도덕적 분노'(moral outrage) 때문에 일어났다는 설명이 힘을 얻게 되었다.
정치사회학에서 저항운동을 설명하는 이론을 보면, 전위 조직의 동원을 주목하는 가설과 민중의 자발적 참여를 주목하는 가설이 늘 경합하고 있는데 '1946년 10월'에 대한 설명도 그러했다. 전위 조직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보는 견해가 한때 있었으나 차츰 민중의 분노와 자발적 참여가 주요 동인이었다는 해석이 많아졌다.
민중의 도덕적 분노는 미 군정의 실정에 대한 불만이었다. 민중은 그 나름대로 정의의 기준을 가지고 있었다. 무엇보다 식민 통치가 끝난 상황에서 다시 등장한 친일 매국 세력의 행태가 분노를 자아냈다. 식민지 지배 시기 조선총독부 권력에 기생했던 친일 경찰, 관료들이 해방 후 미 군정에 의해 다시 살아나는 것을 보고 우리 민중의 가슴에 도덕적 분노가 끓어올랐다.
분노가 저항으로 불붙도록 한 계기는 미 군정의 '식량 공출'이었다. 미 군정의 식량 공출 정책은 대단히 위압적이었다. 일본의 앞잡이 노릇을 하다가 해방 이후에는 미 군정의 끄나풀이 되어 식량 공출을 강압하러 나서는 사람들에 대한 반감은 컸고, 그런 부조리극과 같은 현실에 대한 좌절감은 깊었다. 민중의 어려운 삶을 함께 지탱해 줄 공동체는 없어져 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대구의 민중들이 먼저 일어섰다.
미 군정은 이런 민중의 생존권적 요구를 수용하기는커녕 민중의 저항을 폭력적으로 봉쇄하는 길을 택했다.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추진한 미 군정의 대대적 색출, 제거 작전에 따라 많은 이가 희생되었다. 단 하나의, 작은 반대 세력조차 남기지 않는다는 '청소' 작업으로, 또 공동체 내부의 분열과 대립으로, 그해 가을 들판에는 핏빛 노을이 일렁거렸다.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나 '골로 간' 사람들이 통한을 남겼다. 1946년 10월부터 한국전쟁 때까지 이들의 한이 맺힌 눈물이 모여 여울을 이루고 그것이 강물이 되었다.
내후년(2026년)은 '1946년 10월'로부터 80년이 되는 해다. 우리 대구 지역에서 '1946년 10월'의 역사적 해원을 시작하자. 우선 이의 역사적 진실을 규명하는 연구를 해야 할 것이다. '1948년 4월 제주'나 '1948년 10월 여순'의 역사적 해원도 끈질긴 연구 성과가 밑바탕이었다.
우리도 '1946년 10월'에 대한 치열한 역사 연구를 통해 해원의 실마리를 찾아보도록 하자. 이념적으로 가위질당하고 정치적으로 부풀려진 것들을 바로잡아 '1946년 10월'의 참모습을 드러내 보이자. 그것이 대구에서 시작된 일이니까 역사적 해원도 대구에서 시작하는 게 마땅하다.
올해도 '골로 간', 골짜기로 끌려가 죽임을 당한 분들의 영면을 비는 눈물 젖은 추모행사가 가창댐 골짜기 한쪽에서 열렸다. "아버지!"를 외치는 유가족도 이미 연로했다. 더 기다릴 시간이 없다. 눈부신 10월의 아침, '1946년 10월'의 역사적 해원에 대해 함께 생각하는 아름다운 대구경북이 되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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