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재 가르침에 태동한 '영남 사림'…조선 인재의 보고 선산
야은 길재, 태종 이방원과 동문수학…"두 임금 섬기지 않아" 벼슬 제수 거부
구미 선산 낙향 후 후학 양성에 힘써
김숙자·김종직 부자, 송당 박영 배출…'3대 성인' 불리는 황기로도 지역 출신
금오산 정상 바위 '후망대' 필체 남아
구미 해평면 소재지에서 상주로 가는 국도 25호선. 나지막한 고개를 관통하는 도로 양쪽으로 수많은 고분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모습이 한 눈에 들어온다. '구미 낙산리 고분군'이다. 한적한 야산에 산재한 무려 200여기의 크고 작은 고분 군락이 낯설고 이채롭다. 마치 경주 '금척리 고분군'처럼 도로를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갈라진 채 황량하면서도 '미스터리한' 옛 고분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다.
일제 때 3차례에 걸친 발굴조사가 있었고 1987~88년 2년간에 걸쳐 정밀발굴조사가 재개됐다. 출토된 유물을 통해 5세기 말~6세기 전반 조성된 것으로 확인됐다. 아마도 신라시대 이 지역을 다스리던 수장들과 호족들의 무덤이었을 것이다. 인근에 '낙산리 3층 석탑'도 있어 이 지역이 한 때 번성한 곳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천년고도 경주나 대가야 고령이 아닌데도 이처럼 거대한 고분군이 1,500여년 세월이 흘렀어도 사라지지 않고 세월을 견뎌냈다는 사실이 놀랍다. '낙산리 고분군'을 관통하는 국도변을 수놓은 검붉은 배롱나무 꽃 들이 고분들과 조화를 이루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진 고분의 주인공들에 대한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이들은 이 지역을 주름잡던 지배층들이었을 것이다.

◆ 조선 인재 반이 영남, 영남인재 절반은 선산
'택리지'(이중환)는 구미(선산)를 조선인재의 보고(寶庫)라고 했다. 조선 인재의 반이 영남에서 나는데 영남인재의 절반이 선산이 배출했기 때문이었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찾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야은(冶隱) 길재(吉再)가 지은 '회고가'의 한 대목이다.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인 이방원은 길재와 동문수학한 인연으로 길재를 불러들여 조선개국에 동참해줄 것을 강요했다. 길재는 정도전 등과 달리 고려왕조에 대한 충절을 이유로 일언지하에 거부했다. '군자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君子不事二君)' 이 얼마나 간결하면서 기개 높은 선비의 소신인가?
선산에 길재 같은 조선 성리학을 이끈 학문이 높은 뛰어난 인재들이 많이 난 것은 '금오산' 봉우리가 선산 쪽에서 보면 '붓끝'같이 보인 덕분이라는 오래된 이야기도 있다. 그래서 '필봉'(筆鋒)으로 불리기도 했다. 전설은 또 있다. 임진왜란 때 원병으로 온 명나라 장수가 이곳에서 조선의 인재가 많이 나는 것을 막고자 군사를 시켜 금오산에 올라가서 맥을 끊고 쇠못을 박아 땅의 정기를 눌렀다고 한다. 그 후 실제 선산 땅에서는 조선 말기까지 큰 인물이 나오지 않았다.

◆박정희와 '킹메이커' 허주 김윤환
구미에서 대구로 가는 길목에 장천(長川)이 있다. 장천면소재지 한 가운데 자리 잡은 오상중고등학교 교정에는 '허주'(虛舟)라는 아호로 잘 알려진 고 김윤환 전 의원 흉상이 김규환 박사의 흉상과 함께 있다. 구미의 오랜 뿌리 깊은 학교 중 한 곳인 '오상학원'은 1945년 허주의 부친 김동석이 설립했다. 허주는 노태우와 김영삼 두 대통령을 대선에 출마시켜 당선시킨 '킹메이커'였다.
이회창을 통해 세 번째 킹메이커로 나섰으나 실패한 이후 오히려 이회창에게 '팽' 당한 허주는 노태우의 6공 당시 여소야대 정국에서 여당 원내총무로서 협치정치를 이끈 진정한 '정객'이었다. 정치와 정치인이 사라지고 상대를 죽여야 사는 적대적 정치가 횡행하는 시대에 허주 같은 진정한 정객이 그립다.
허주가 구미가 낳은 우리 시대의 정객이었다면 박정희 전 대통령은 산업화·근대화를 통해 '보릿고개의 가난'에서 온 국민을 벗어나게 한 대한민국의 '거대한 뿌리'다. 이념과잉 세력들이 박정희 시대를 인권이 억압받은 독재시대로만 규정하려고 하지만 그 시대를 어두운 기억으로만 채색하는 것은 역사적 오류다. 구미가 대한민국 산업화의 초석과 뿌리역할을 했기 때문에 '4만 달러' 선진국 문턱에 다가선 오늘의 대한민국이 존재하게 된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 조선성리학의 본산
낙산리 고분군이 간접증명하는 영광을 뒤로 하고, 구미가 인재의 보고로 다시 등장한 것은 고려 말~조선 초였다. 성리학의 가르침을 실천한 길재는 태종 이방원의 강압적 벼슬제수를 거부하고 낙향, 후학양성에 힘썼다.
태조 이성계가 '위화도회군'(1388)을 통해 수도 개경을 함락시킨 후 우왕을 사로잡아 유배시킨 서슬퍼런 시절이었다. '반란'소식을 전해들은 길재는 '백이숙제'(伯夷叔齊)의 고사처럼 초야에 묻혀 고사리를 뜯는 삶을 선택했다.
길재가 조선 성리학의 스승이 된 것은 그의 문하에서 김숙자·김종직 부자와 송당 박영 등이 성장, 조선성리학의 기초를 마련했기 때문이다. 길재로부터 김숙자·김종직 부자, 박영 등을 통해 구미는 명실상부한 조선성리학의 본산이 된다.
이중환이 선산을 영남인재의 보고이자 조선 성리학의 최선진지라는 칭송을 마다하지 않았던 것은 택리지를 쓴 당시 명망높은 영남선비들이 대거 배출되면서 '영남사림'(士林)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신라 '김생', 조선 이순신 장군과 더불어 3대 성인(三聖)으로 불리는 고산 황기로도 고아 사람이다. 황기로는 초서(草書)의 대가라는 의미로 '초성'(草聖)으로도 불렸다. 2013년 금오산 정상바위에서 발견된 '후망대'(堠望臺)라는 음각글씨가 고산의 필체로 확인되면서 복원작업이 이뤄지고 있다.
이후 사화에 연루된 영남사림이 조정의 박해를 받고 '송당학파' 등에 의해 길재의 학풍이 이어졌음에도 조선성리학의 본산이 퇴계의 안동으로 넘어간 것은 구미로서는 못내 아쉬운 대목이다.
선현 유림들의 활약으로 구미를 관향으로 하는 권문세족들도 흥성했다. 야은 길재의 '해평 길(吉)씨'를 비롯, 김종직 등을 배출한 '일선 김(金)씨', 그리고 '인동 장(張)씨'가 대표적이다.
'뜬구름 같은 벼슬 급급할 것 있으랴(軒冕儻來非所急)
큰 기러기는 날아가고 일개 어둠만 남겠네(飛鴻一箇在冥冥)'
고려 말 삼은의 한 사람인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길재에게 준 싯구다. 뜬구름 같은 벼슬에 연연하지 말고 학문을 하라는 충고였다. 야은이 낙향, 후학을 받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전국에서 선비들이 몰려와서 야은 문하에서 강해(講解)를 청했다. 벼슬을 탐하지 않고 초야에 묻혀 사는 것을 더 높이 사는 '영남사림' 학풍은 길재가 형성한 것이나 다름없다.
금오산 올라가는 길에 성리학역사관과 '채미정'(採薇亭)이 있다. 채미정은 길재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조선 영조 때 선산부사 민백종이 유림의 뜻을 모아 건립한 정자로, '채미'(採薇)라는 시호는 백이숙제가 고사리를 캐서 살았다는 고사에서 비롯됐다. 길재를 배향한 '금오서원'도 금오산 자락에 있었으나 현재는 선산읍에 있다.

서명수 객원논설위원(슈퍼차이나연구소 대표)didero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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