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어릴 적 시골 마을 이장은 큰 벼슬이나 한 듯 목소리가 높았고, 으스대기 일쑤였다. 한 자리 맡으면 대개 거만했으나 사람들은 그저 그런 꼴사나움을 눈감고 살았다. 그래서 "억울하면 출세하라, 출세하거라!"는 말을 내뱉곤 했다. 사실 이런 풍경이 과거의 일만은 아니다. 요즘도 흔하게 목격할 수 있다. 멀쩡한 사람도 완장을 채우면 태도가 확 달라진다. 무슨 대단한 권력을 손에 쥔 것처럼 행동한다. 호칭과 자리가 사람을 결정한다.
최근 국회 청문회의 광경은 한마디로 가관이다. 무슨 무슨 위원장이란 완장을 찬 이들의 작태는 한마디로 촌스럽고, 추하다. 오래 쳐다본다고 "퇴장하라"느니, 이념이 다르다고 해서 "뇌 구조가 이상하다"느니, 해괴한 말들을 마구 내뱉어댄다. 모두 뭔가 아는 듯한 얼굴로 '법'을 들먹거리긴 하나 유치찬란하다.
게다가 어느 의원은 완장을 좀 찼다고 웬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듯 고성을 버럭버럭 질러댄다. 겸손과 품격은 커녕 포악과 무례의 극치를 목도한다. 저 양반들이 도대체 한풀이나 하러 나왔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내가 낸 세금이 저런 사람들을 위해 쓰인다니 한심스럽다.흔히 어떤 책무나 권한을 부여받았을 때 '완장 찼다'고들 한다. 완장(腕章)이란 팔에 두르는 표장이다.
예를 들면 교통지도나 사건처리반 담당자들 혹은 상갓집 상주들이 팔에 찬 것이 그것이다. 완장에는 색깔이나 표시(기호)가 들어있다. 이런 표장(標章)은 소속, 지위, 권력 등을 나타내는 상징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완장에 대한 의식은 부정적이다. 무엇 때문인가? 일제강점기나 6.25 전쟁기 등의 혼란한 시기에 민중들이 겪었던 권력의 포악성과 야만성 때문일 것이다.
완장이란 말이 틈틈이 그런 과거의 집단 트라우마를 상기시켜주곤 한다. 사실 완장은 그 자체로는 의미가 없다. 완장 밑에 숨어있는, 그것을 그렇게 만든 '약속', 그리고 '다른 완장들과의 관계(차이)'가 그 의미 내용을 결정한다. 이 두 가지를 빼고 나면 완장은 의미 없는, 하나의 공허한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
먼저, 완장은 구성원들이 합의하여 만든 규칙(법 규정 등)에 의해 권위를 갖는다. 그러니 합의를 통해 얼마든지 그 규칙을 바꿀 수 있다. 완장이라는 형식은 실체가 없고, 가변적이라는 말이다. 서로 약속을 달리하면 완장의 의미도 달라진다. 예컨대 개를 개라고 부르는 이유는 우연이다. 개를 돌멩이라고 약속하고 부르게 되면 개는 곧 돌멩이가 된다.
개라는 명칭은 실제 살아 움직이는 개와 다르다. 그래서 "개는 짖어도 개라는 낱말은 짖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명칭'과 '그것이 지시하는 대상(실제)'이 일치한다 생각하면 착각이다. 명칭은 실제를 그렇게 부르기로 한 '약속'일 뿐이다.
이어서, 완장은 다른 완장들과의 차이(관계)로 해서 그 의미가 결정된다. 예컨대 상갓집 완장은 그어진 줄이 '하나인가, 둘인가, 아니면 아예 없는가'에 따라 고인과의 관계를 표시한다. 일반적으로 두 줄은 상주 이하 직계 가족을, 한 줄은 고인의 형제나 방계가족을, 줄이 없는 것은 가까운 인척, 장례 주관자, 일 보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이처럼 완장에서 줄의 숫자가 갖는 의미는 세 가지 종류의 완장이라는 상호 관계 속에서 정해진다. 물론 이것도 약속에 의한 것이다. 그러므로 규칙을 바꾸면 숫자의 의미도 달라지기 마련이다.
이같이 완장의 배후에 숨은 '약속'과 '차이(관계)'를 읽어낼 수 없다면 그 의미가 생성하는 맥락을 놓치고 만다. 마침내 완장에 적힌 명칭을 곧 불변의 실체로 간주하는 우를 범할 수 있다. 흔히 "행간을 읽어라"고 한다. 완장의 의미도 마찬가지다. 자식이 공부는 하지 않고 매일 술만 퍼마시며 쏘다닐 경우, 아버지가 보다 못해 "잘한다, 잘해!"라고 한마디 했다 치자. 이때 순진한 자식이 "잘한다!"는 말만 믿고, "예, 아버지 제가 참 잘하고 있지요!"라 한다면 혼날 것이 뻔하다.
대표를 선출해 간접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는 대의 민주주의 체제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완장질을 잘할 품격있는 정치인을 뽑는 일이다. 그러나 이것도 뜻대로 되질 않는다. 완장을 차고 나면 대부분 자신과 자기편만을 위해 분투한다. 그래서 나라가 망하든 말든 피아를 갈라 싸워댄다. 불편한 현실이다.
흔히 "케잌을 자르는 사람은 케잌을 취해서는 안 된다"는 조건이 있다. 만일 케잌을 자르는 사람이 자기 몫의 케잌부터 취할 궁리만 한다면 누가 그 사람의 언행을 믿겠는가. 양식 있는 국민이 완장 찬 사람들에게 바라는 것은 '공정성'이다. 공정한 사회를 위해 대부분 불편한 정치에라도 기대며, 법을 준수하며 살아간다.
이것이 완장 찬 사람들에게 거는 최소한의 희망이다. 그런데 국회의원 중에는 전과자이거나 피의자로 재판 중인 사람들이 허다하다. 이들은 하나같이 입만 열면 법을 따진다. 그리고 자신들에게 유리한 법안이라 판단되면 무엇이든 마구 통과시킨다. 우리 사회에 불법, 탈법, 사기가 난무하는 것도 다 이유가 있는 듯하다.
어쩔 수 없이 완장을 믿고 따르나 자존심이 보통 상하는 것이 아니다. 하다 하다 안 되면, 차라리 인공지능(AI)에게 정치적, 법적 판단을 맡기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영남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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