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정훈 기획탐사팀 기자
7월 초순 찌는 듯이 무더운 어느 날 저녁 무렵….
러시아 대문호 도스토옙스키의 장편소설 '죄와 벌'은 이렇게 시작한다. 주인공 라스콜니코프는 이때로부터 한 달 전쯤 전당포에서 노파를 만났다.
그는 노파에게 아버지의 유물인 은시계를 저당품으로 4루블을 빌려 달라고 제안하지만, 노파는 '시시한 것'이라며 1루블 반밖에 줄 수 없다고 했다. 그전부터 노파에게 무시당해 온 라스콜니코프는 살인 충동을 느끼지만, '한심한 생각'이라며 이윽고 분노를 억누른다.
하지만 한 달 뒤 그는 실제로 노파를 죽였다. 도끼로, 잔인하게. 원래 계획엔 없던 노파의 동생까지 무참히 살해했다. 그의 한심한 생각이 계획으로, 그리고 현실로 변하는 과정에서 무더위도 영향을 끼쳤을 거라고 확신한다.
가난한 법대생이었던 라스콜니코프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5층짜리 낡은 아파트의 맨 꼭대기 다락방에 세 들어 살고 있었다. 방은 벽장처럼 좁았고, 도시 특유의 여름철 악취와 인근 술집 거리에서 풍겨 오는 냄새가 뒤섞여 그를 괴롭혔다.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했고, 방세와 식대도 잔뜩 밀렸다. 그리고 숨이 턱 막힐 정도로 무더웠다. 정신이 혼탁해진 라스콜니코프는 엘리트인 자신에게 타인을 벌할 권리가 있다는 신념을 품게 되고, 이를 실행에 옮긴다.
라스콜니코프의 살인엔 여러 원인이 겹쳐 있다. 그의 행위를 '그럴 만했다'고 두둔하는 건 절대 아니다. 모든 사람이 덥다고 살인을 저지르는 건 더더욱 아니다. 그만큼 폭염이 조용하면서도 집요한 재난이라는 걸 말하고 싶다. 산사태나 홍수 같은 재난은 인간이 버텨낼 수 있는 재난이 아니다. 토사에 묻히고, 강물에 휩쓸려 일상을 잃게 된다.
하지만 폭염은 다르다. 폭염은 누군가에겐 하루하루 이겨내야 하고, 일상 속에서 지속되는 재난이다. 뜨거운 햇볕 아래서 시멘트 자루를 옮기고, 그늘 한 점 없는 밭에서 우비를 뒤집어쓴 채 농약을 뿌리는 것이 일상인 사람들이 있다.
그나마 집에 돌아오면 에어컨을 켤 수 있는 사람은 나은 축에 속한다. 에어컨이 없어 찬물로 채운 페트병을 끌어안고 자는 사람도 있다. 전기료 부담으로 꺼둔 에어컨을 틀자고 조르는 아이와 싸우는 엄마도 어딘가에 있다.
폭염은 조용한 재난이다. 적어도 아직은 그렇다. 폭염에 취약한 이들이 엄청난 정신력을 발휘해 이를 참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들의 정신력에만 의존할 순 없다.
상트페테르부르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무더운 '대프리카'의 미래는 어둡다.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이는 정책이 중간 단계로 실현된다는 가정을 적용했을 때 2041년에 접어들면 대구의 폭염일수는 지금보다 26.9일이 늘어난 59.3일이 된다. 2081년이 되면 75.5일까지 많아질 전망이다. 최대 하루 최고기온 역시 2041년 41.3℃, 2081년 42.5℃로 상승하게 된다.
우리 사회에서 폭염은 자연 재난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에 따라 폭염 대책도 공급자 위주의 피서 시설 설치, 생수 등 보급품 지원에 그치고 있다. 폭염을 사회적 재난으로 보는 인식이 필요하다. 정신건강 문제를 포함해 폭염 취약계층이 겪는 애로 사항을 연구하고, 그에 따른 실제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가까운 미래에 폭염은 더 이상 '조용한 재난'에만 머무르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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