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뿌리, 구미] <2>'박정희 도시'의 노스탤지어

입력 2024-07-25 13:30:00 수정 2024-07-25 18:30:11

대한민국 발전 뿌리 된 리더십 "이제 역사와 화해의 손 잡아야"
대권 두고 경쟁했던 김대중 전 대통령…대북정책 대실패에도 곳곳에 기념관
광주·목포는 'DJ도시' 자처 추모 경쟁
이념전쟁에 朴 공과 정당 평가 못 받아…정치적 이용 멈추고 증오 족쇄 풀어야
구미 새마을공원 등 '박정희 도시' 면모

박정희대통령역사자료관 로비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재임 시절 이용한 의전차량인 메르세데스-벤츠가 전시돼 있다..
박정희대통령역사자료관 로비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재임 시절 이용한 의전차량인 메르세데스-벤츠가 전시돼 있다..

◆한강의 기적을 이룬 대통령

시인 김수영은 박정희가 우리시대의 뿌리가 될 것인지 예견했던 모양이다.

그가 5.16 직후인 1964년에 쓴 '거대한 뿌리'의 "...버드 비숍女史를 안 뒤부터는 썩어 빠진 대한민국이 괴롭지 않다./ 오히려 황송하다. 歷史는 아무리 더러운 歷史라도 좋다./진창은 아무리 더러운 진창이라도 좋다./나에게 놋주발보다도 더 쨍쨍 울리는 追憶이 있는 한 人間은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라는 표현으로 시대적 상황을 에둘러 비판했다.

박정희 시대는 김수영의 '거대한 뿌리'이후 15년 더 지속했다. 18년간의 장기 집권이었고 박정희는 그 시대를 지배한 '독재자'였다. 민주주의는 유보됐고 시민들은 숨을 죽이고 참아야 했다. 대신 우리는 '보릿고개'를 넘었고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내면서 산업화의 기반을 마련하는 데 성공했다. 박정희 시대가 지나면서 우리는 비로소 '아시아의 4용'(龍)이 될 수 있었고 선진국 문턱에 다다를 수 있었다.

'민주화를 억압한 독재자였지만 나라를 잘 살게 한 대통령'이라는 상반된 평가는 공존할 수 없을까?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서거한 지 올해로 45년이 지났다. 어느 날 갑자기 그가 서거하자 온 국민이 깊은 슬픔을 느꼈다. 북한 독재자들의 사망소식이 전해졌을 때 본 북한인민들의 통곡과는 전혀 다른 감정이었다.

그로부터 한 세대 이상의 시간이 흘렀다. 그럼에도 우리는 박정희 시대의 '상처'를 제대로 치유하거나 극복하지 못한 모양이다. '박정희 노스탤지어(향수)'얘기만 나와도 거부감을 갖는 사람들이 있다. 지금 우리는 이념전쟁이 상시적으로 벌어지는 세상에 살고 있다.

그럼에도 대통령선거 등 선거 때마다 보수·진보를 막론하고 대선주자들은 박정희 전 대통령을 호출한다. 지난 대선에서도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는 '박정희 시대의 불균형성장은 불가피했다'며 제1호 공약으로 성장 회복을 내놓으면서 박정희시대의 성장을 제시했다. 보수정당의 박정희 노스탤지어는 아주 노골적이었다. 대선주자들은 경선 때부터 구미의 '박정희 생가'를 찾아와서 참배하는 모습을 노출했다.

구미에는
구미에는 '생가'를 중심으로 '박정희생가 공원화사업'과 '새마을테마파크 조성사업' 등을 통해 '박정희대통령 역사자료관'과 '새마을테마공원', '박정희 동상' 등이 들어서면서 '박정희 노스탤지어'(향수)를 자극할 수 있는 '박정희도시'의 면모를 갖췄다.

◆ 경제성장 등 성과들 외면해선 안돼

구미에는 '생가'를 중심으로 '박정희생가 공원화사업'과 '새마을테마파크 조성사업' 등을 통해 '박정희대통령 역사자료관'과 '새마을테마공원', '박정희 동상' 등이 들어서면서 '박정희 노스탤지어'(향수)를 자극할 수 있는 '박정희도시'의 면모를 갖췄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고향이자 박 전 대통령 시절 내륙 최대의 전자산업도시로 성장한 것이 '박정희도시'로서의 최적의 조건을 마련한 것이다.

구미가 전적으로 박 전 대통령의 후광만으로 성장한 도시라는 것은 아니다. 구미는 조선성리학의 본향이었고 그 덕분에 조선시대 영남 인재의 반을 공급한 인재의 보고로도 이름을 널리 알렸다.오래된 도시가 산업화의 첨병으로 새롭게 탈바꿈했다고 보는 것이 맞다.

87년 체제 이후 진보진영이 경기를 일으키듯 경계하는 단어가 '박정희'였다. 오늘의 대한민국 위상을 만들어 준 산업화 초석을 마련한 시대의 대통령을 '입에 올리지도 못하게 한' 우리 사회의 금기에 대한 '악마화'는 악랄하고 집요했다. 공과(功過)에 대한 정당한 평가도 하지 않은 채 묻어버린다면 비겁하다. 그의 시대는 기본적으로 오랜 장기집권과 민주화를 외면한 독재의 시대라고 규정하는 것이 틀리지 않다. 그렇다고 그 시대가 이룩한 경제성장 등 여러 성과들을 외면해서은 안되고 외면할 수도 없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는 사이 우리는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도 못하는 '홍길동'이 되어버렸다. 박정희시대 18년을 현대사에서 도려내거나 지울 수 없다. 배고픔을 해결하고 보릿고개를 극복하지 않은 채 어느 날 갑자기 우리경제가 세계 7위의 무역대국이 될 수는 없다.

'박제해 둔' 박정희를 제대로 평가하고 기억하는 것은 보수와 진보 진영의 정치적 뿌리를 되찾는 문제가 아니다. 대한민국의 뿌리를 되찾는 일이다. 민주화억압과 독재라는 어두운 면과 비약적 경제성장을 이끈 CEO였다는 양면을 모두 들추어내야 한다.

노벨평화상기념관
노벨평화상기념관

◆ 광주와 목포는 김대중 도시로

김대중 전 대통령은 박정희 전 대통령 사후 19년 후 15대 대통령이 됐고 2009년 서거했다. 박 전 대통령과 대선에서 맞붙기도 했고 그 시대 박 전 대통령의 정적이었다. 그는 목포가 낳은 최고의 인물이었고 김영삼 전 대통령과 더불어 민주화세력의 양대 산맥으로 우뚝 섰다.

그래선가 서울을 비롯 광주와 목포 등지에는 김대중 도서관과 김대중 센터 김대중 대교 등 그의 이름을 붙이고 그를 기리는 각종 기념건축들이 즐비하게 세워졌다. 광주와 목포는 'DJ(김대중)도시'라는 영광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어딜가나 '김대중 향기'가 난다. 아시아 최대 규모의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 있고 '김대중 컨벤션센터'가 있다.

김대중 동상
김대중 동상

이에 질세라 DJ가 청년시절 사업가로 활동하기도 한 목포 삼학도 바로 옆에는 '김대중 노벨평화상 기념관'이 있고 인근 전남도청 정문 앞에는 '김대중 광장'이 조성돼 4m크기의 '김대중 동상'도 자리하고 있다. 신안 하의도에는 생가가 있고 전남도청 앞 도로는 'DJ길'이다. 그의 호 '후광'을 딴 '후광로'로 명칭이 바뀌었고 김대중 대교도 있었다. 이 동네 사람들은 'DJ'라는 애칭과 사투리로 '선상님'으로 부르면서 사랑하고 존경하고 추모하는 전직대통령이 있다는 것이 부러웠다.

그러나 그의 대북 '햇볕정책'은 대실패였다.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남북간 화해와 협력을 모색하고 북한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북한은 핵개발을 멈추지 않았고 우리의 대북지원을 악용, 핵개발 비용으로 전용했다. 누구도 DJ의 과오를 지적하지 않는다. 햇볕정책은 여전히 그 시대의 성과였다.

목포 김대중 노벨평화상 기념관 옆 공원에는 두 손을 맞잡은 화합의 손 조각상이 있다.
목포 김대중 노벨평화상 기념관 옆 공원에는 두 손을 맞잡은 화합의 손 조각상이 있다.

◆박정희와 김대중의 역사적 화해

'튼튼한 뿌리 없이는 큰 나무가 자랄 수 없다.' 대한민국이라는 큰 나무가 성장하기까지에는 이승만에서부터 박정희, 김대중이라는 거대한 뿌리가 단단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진보와 보수라는 진영과 이념의 틀에서 벗어나면 대한민국의 뿌리가 자랑스러워진다. 목포 김대중 노벨평화상 기념관 옆 공원에는 두 손을 맞잡은 화합의 손 조각상과 구미 '금오산'모형이 조성돼있다.

구미와 목포, 박정희와 김대중의 역사적 화해였다. 박정희와 김대중은 여전히 살아있는 것처럼 보인다. 여야가 첨예하게 맞붙는 선거 때만 되면 지역감정을 악용하는 정치인들에 의해 소환돼 충돌하지만 뿌리는 흔들리지 않는다.

'박정희 노스탤지어'를 더 이상 부정적으로 바라볼 이유가 사라졌다. 광주와 목포는 김대중 전 대통령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도시 곳곳에 DJ의 향기를 불어넣고 DJ로 색칠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다.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증오와 거부의 족쇄도 풀어야 한다. 목포가 구미에 손을 내밀었던 것처럼 말이다.

정치적으로 이용하지만 않는다면 구미를 '박정희도시'로 각인하고 박 전 대통령을 기억하고 그 시대의 유훈을 추억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서명수 객원논설위원(슈퍼차이나연구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