뱃사람들의 해장국! 어, 포항은 육수가 없네
TV 예능 통해서 유명해진 포항물회…고추장 소스만 얹고 무채 대신 배채
1분 정도 비비고 입맛 따라 물 추가
서둘러 온몸을 휘감는 한낮의 퇴약볕. 여름이 왔다. 지금쯤 서귀포 보목항에는 어른 손바닥만한 자리돔, 그리고 영덕 강구항 근처에선 미주구리(물가자미), 울릉도 근해에는 꽁치가 잡힐 것이다. 물회만큼 지역색이 짙은 것도 드물 것이다. 초년병 기자 시절에는 솔직히 아는 게 별로 없어 '포항물회'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 얼추 30년을 지내고 보니 '팔도물회인문학'에 대한 담론을 조금 깔아볼 수 있는 식견이 생겨났다.
◆어부들의 해장국
물회는 뱃사람들과 동고동락한다. 항상 독주(毒酒)에 휘감겨 있는 그들의 속을 단숨에 쓰다듬어주는 것 중 물회 만한 게 있을까 싶다. 그들의 '해장국'인 셈. 만들기가 쉽다. 찬밥을 물에 말아 국처럼 먹으면 된다.
2010년을 넘어서면서부터 물회가 고급화된다. 도다리, 가자미, 우럭, 노래미, 쥐치, 도미 등 흰살 생선에서 벗어나 해삼, 멍게, 오징어, 한치, 전복, 소라, 성게알, 심지어 '한우물회'까지 명함을 내밀고 있다.
물회도 지역색이 있다. 크게 분류하면 포항권, 울진·속초권, 울릉권, 제주도권, 장흥권 등 5대 권역으로 나뉜다. 울진·속초권 물회는 오징어, 울릉도는 꽁치, 식초와 된장이 주재료로 등장한 제주도와 장흥권은 자리물회와 된장물회가 활성화돼 있다.
자리물회와 사촌 간은 전남 장흥군의 명물인 '된장물회'. 원래 된장물회는 며칠씩 고기잡이를 나간 어부들이 시어진 김치류에 생선과 된장을 섞어 먹은 데서 유래했다. 5년 전 쯤인가, 장흥문화원 위종만 사무국장과 군청 바로 근처에 있는 '싱싱횟집'에서 된장물회를 먹었다. 회진면에서 3분 정도 차로 달리면 진목리 '삭금마을'이 나타난다. 삭금마을이야말로 장흥 된장물회의 출발지다. 회진면 회진리에 30여년 역사의 '우리횟집'이 있다. 된장물회 원조식당인데 작고한 김실녀 할머니가 그 음식을 장흥 전역으로 퍼트렸다. 여름엔 제철인 갯장어(하모)가 된장물회의 으뜸 재료로 사랑을 받는다. 진목리 '용궁횟집'은 연안 갯벌에 사는 쑤기미를 주재료로 해서 된장물회를 낸다.
◆포항물회 스토리
포항물회는 원조가 무의미하다. 모두 원조고 맛의 질감도 조금씩 다르다. 우열이 아니라 차이밖에 없다. 포항물회를 전국구로 만든 건 유명 TV 프로그램. 1박2일·생활의 달인·백종원 3대천왕 등이 환여식당, 마라도회식당, 새포항물회 등을 줄 서는 핫플로 만들어버렸다. 전국에서 찾아온 탐방객 때문에 이들 식당은 언젠가부터 '관광식당'으로 내몰린 것도 사실이다.
영일대해수욕장 근처에 포항물횟집이 30여곳 모여있다. 그 때문에 환호동 일대는 '설머리 물회지구'로 태어난다. 설머리는 영일대해수욕장 맨 끝 해안마을. 이 밖에 영일대 북부시장, 구룡포항, 죽도시장 등도 물회권이다. 죽도시장은 '관광객 천지'라서 토박이들은 상대적으로 잘 가지 않는다.
포항물회를 전국에 알린 식당주는 누굴까. 1960년대 최초로 포항 육거리에서 문을 연 '영남물회'의 허복수 할매. 1991년 동아일보 김봉호 편집위원이 그 할매를 취재했다. 그 기사에는 61년이 개업 연도로 소개됐지만 실은 사업자등록증을 낸 건 67년이다. 이후 김태식·전경화 부부에게 이어진다.
물회용 생선도 두 종류가 있다. 그물바리와 낚시바리. 덜 상한 낚시바리가 훨씬 더 비싸다. 비싼 걸 사용해야 되는데 가격 때문에 그렇지 못한 게 현실이다.
8℃에서 사는 참가자미, 14℃에 맞춰야 잘 사는 우럭, 광어 등 양식 어종의 생리부터 알아야 이 장사를 할 수 있다. 일반 회와 달리 물회용 회는 그 육질이 집집마다 들쭉날쭉하다. 그걸 손님이 정확하게 감지할 수 없다. 비싼 낚시바리를 정상대로 사용하면 가격이 비쌀 수밖에 없다. 제대로 된 자연산 세코시 도다리물회 정도면 얼추 3만 원 정도는 받아야 될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럴 수 없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양식이나 그물바리를 뒤섞고, 심지어 흠집이 있어 횟감을 미리 썰어 정상 생선과 섞은 뒤 자극적인 육수까지 부어놓으면? 싼 게 비지떡일 수밖에.
◆새콤달콤해진 물회
2000년쯤 포항에도 새콤달콤한 육수를 앞세운 물회가 등장한다. 관광객 탓이다. 원래 포항 물회에는 육수가 없다. 고추장 소스만 얹는다. 나머지는 손님이 입맛에 맞춰 물을 추가해 말아먹으면 된다. 물론 토박이는 육수 없는 걸 선호한다. 마니아일수록 해삼, 멍게, 해초류 등 요즘 유행하는 복잡하고 화려한 버전도 멀리한다. 새콤달콤한 육수는 매실 진액, 설탕, 물 등에 배와 사과, 양파, 식초 등으로 만든다. 관광객 때문에 영일대해수욕장권에선 육수와 맹물을 동시에 내놓고 골라 먹게 한다. 포항과 달리 서울로 올라간 포항물회는 거의 새콤달콤한 육수형 물회로 변해버렸다.
담백한 광어보다 고소한 맛이 더 짙은 도다리가 횟감으로 제격이다. 포항물회의 맛은 거의 고추장 맛이다. 목넘김을 좋게 하기 위해 무채가 아니라 배채를 넣는다. 포함물회는 먹기 전에 1분 정도 잘 비벼준다. 상태를 봐가면서 물을 조금씩 부어준다. 물미역보다 떫은맛이 덜한 '쫄쫄이 미역'. 이게 고추장으로 조금 얼얼해진 입안을 중화시켜준다.
◆기타 별미 물회들
울릉도에선 유난히 '꽁치 물회'를 즐긴다. 그런데 지금은 볼 수 없는 손꽁치 물회가 유명했다. 예전 울릉도에선 꽁치를 손으로 잡았다. 산란기 때 나룻배 옆에 수초를 붙여두면 알을 낳으려는 꽁치가 수초 위로 접근한다. 이때 손으로 낚아채 물횟감으로 사용한다.
남해 통영, 거제 등에선 멸치가 많이 잡혔다. 이 멸치를 갖고 국수에 말아 '회국수물회'를 만들어 먹었다.
부산에 물회집들이 집단화된 곳은 영도 남항동 인근의 '물회집골목'이 유명하다. 제주식 '자리물회'와 동해식 '오징어 물회'를 하는 곳도 더러 있지만, 대부분 '눈볼대 물회'를 내놓아 부산식 '눈볼대 물회'의 원조 지역으로 손꼽힌다. 눈볼대는 '금태'란 이름을 가진 빨간 생선이다.
전남 장흥군 회전면 삭금마을의 여름날은 '쑤기미 된장물회'로 더위를 식힌다. 쑤기미는 잘피가 군락을 이룬 회진면 앞바다에서 많이 잡히는 생선이다. 쑤기미 등에 돋아난 날카로운 가시에 쏘이면 생명을 위협할 정도라는데, 그런 위험을 기꺼이 감내하는 이유는 그 맛이 다른 생선과는 비교가 안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자리는 농어목 자리돔과에 속하는 바닷물고기로 제주에서는 '제리', '자돔' 등으로 불린다. 제주에서는 자리를 떠서 잡는다. 왜 떠야 하는 걸까. 제주도 지질을 이해해야 한다. 물속에서 폭발해 만들어진 한라산과 300여 크고 작은 오름이 제주를 만들었다. 바다로 흘러내린 용암 지형에선 그물을 끌기도 드리우기도 어렵다. 바위틈이나 작은 구멍에 낚시를 넣어 잡는 '고망낚시'나 그물을 조심스럽게 가라 앉혔다가 올리는 '들망'이 적정기술.
자리물회가 전국적인 명성을 얻게 된 것은 1970~80년대 모슬포항 '항구식당(1964년 개업)'의 자리물회가 크게 인기를 얻으면서부터. 하지만 이제 자리물회하면 보목항을 1번지로 친다.
고인이 된 코메디언 이주일도 요양차 별장을 짓고 살다 갔다. 그리고 항 입구에 한기팔 시인의 자리물회 시비도 세워져 있다. 보목항의 여름 새벽은 자리를 잡으러 가는 배들로 요란한다. 통상 세 척의 배가 움직인다. 모선인 큰 배 한 척에 작은 배 두 척이 딸린다. 자리는 멀리 오가지 않고 무리를 지어 서식처 주변에 머물기에 들망을 이용해 기다렸다가 잡는다. 자리를 유인하기 위해 미끼를 뿌리기도 한다. 이렇게 자리가 많이 있는 곳을 '자리여'라고 한다.
모슬포 자리는 상대적으로 뼈가 억세 구이로 좋다. 반면 보목항의 자리는 뼈가 부드럽고 고소해서 물회로 딱이다. 하지만 토박이는 뼈가 억센 걸 더 선호한다. 나도 그걸 먹어봤는데 뼈 때문에 식감을 제대로 음미할 수가 없었다. 비양도의 자리는 크기가 작으니 젓갈로 좋다고 한다. 지금도 보목이나 모슬포의 어민들은 서로 자리가 많이 있는 명당자리를 잡기 위해 자리철이면 밤잠을 설친다. 물회와 젓갈용으로 서귀포 보목자리, 구리와 조림은 모슬포·마라도·가파도 자리를 꼽는다.
된장·식초·제피가 자리물회의 3대 양념이다. 육지와 달리 고추장은 노땡큐! 제주도는 고춧가루·고추장이 아니라 된장·간장 문화가 지배적이다. 매콤한 고춧가루를 대신한 것은 추어탕에 반드시 넣는 제피. 그래서 자리물회는 향이 강한 게 특징이다. 냄새가 강해 일반 관광객을 상대하는 집에서는 감향(減香)을 해서 낸다.
제주물회에는 식초가 한몫을 한다. 전문식당에 가면 두 종류의 식초가 비치돼 있다. 과일식초와 빙초산이다. 흥미롭게도 현지인들이 많이 찾는 건 빙초산. 물론 공업용이 아니다. 물론 이들 식초는 정통이 아니다. 자리물회에는 일반 식초 대신 제주도 전통 발효식초인 '쉰다리식초(보리막걸리를 삭혀 만든 식초)'를 사용해야 한다. 그런데 그게 거의 사라졌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너무 유명해진 데는 피하는 게 좋을 것 같다. 특별난 음식이 없듯, 대단한 물회가 존재할 거란 생각은 초보의 몫. 방송 때문에 벼락 출세한 보목항의 Y 식당보다 토박이들이 사랑방처럼 찾는 식당을 이용하는 게 어쩜 더 가성비가 높을 것 같다. 대구의 물회 전문식당? 다 고기서 거기까진 것 같다. 각자 알아서 찾아가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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