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 절대무상(絶對無常)이다. 권력도 부귀도 기울어가기 마련이다. 그 어떤 사람도 늙음과 죽음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것을 불교에서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고 한다. 세상의 모든 것은 늘 바뀌며 한 모습으로 머물러 있지 않다는 뜻이다. 인생도 그렇다. 태어나는 것이 한 줄기의 바람이 일어나는 것이라면, 죽음은 연못에 달그림자가 잠기는 것이다(生來一陣淸風起 死去澄潭月影沈).
나이가 들어갈수록 인생이 덧없음을 깨달아간다. 하지만 인생무상(人生無常)은 허무주의와는 또 다른 개념이다. 삶의 의미 자체를 부정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보다 높은 가치를 지향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에 너무 집착하고 연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걸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면서도 죽는 날까지 탐욕을 버리지 못하는 게 사람이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조신지몽(調信之夢)과 조선시대 김만중이 지은 구운몽(九雲夢)은 모두 출가 승려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인생무상의 교훈을 설파하고 있다. 하지만 이야기의 결은 사뭇 다르다. 신라 스님 조신은 짝사랑하던 귀족의 딸과 도망을 쳤지만 수십년 세월 모진 풍파를 겪었다. 기어이 자식이 굶어 죽고 아내와도 헤어질 수밖에 없는 참담한 순간 눈을 떠보니 꿈이었다는 내용이다.
구운몽의 주인공은 아름다운 여인들을 데리고 부귀영화를 누리지만 잠에서 깨어난 순간 모든 것이 뜬구름이었음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구운몽은 당쟁에서 밀려나 유배생활을 하던 지은이의 경험과 철학이 투영되었겠지만, 인간의 유한성에서 비롯되는 무상감은 욕망의 추구와 세속의 영달만으로는 해소할 수 없음을 시사한다. 풍상을 겪어도 무상이요 영화를 누려도 무상인가?
조선 제15대 왕 광해군은 15년 동안 옥좌(玉座)에 앉았던 지존(至尊)의 신분이었다. 그리고 18년 동안 유배지에서 폐인으로 살았다. 광해군처럼 천국과 지옥을 오간 영욕의 삶도 드물 것이다. 광해군은 결코 무능한 군주가 아니었다. 임진왜란으로 피폐한 국정의 회복에 힘쓰며 대륙의 명·청(明·淸) 교체기에 실리외교로 대응하며 부국강병을 모색했다. 그러나 당쟁의 회오리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계모인 인목대비를 유폐시키고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인 폐모살제(廢母殺弟)에다 대명사대(對明事大)를 하지 않았음을 빌미로 일으킨 인조반정으로 폐위되었다. 강화도에 위리안치되어 있을 때 왕비와 세자 내외가 목숨을 끊었지만, 광해군은 삶의 끈을 놓지 않았다. 제주도로 쫒겨나 자신의 시중을 들어야 할 별장이 주인행세를 하고 여종이 패악질을 하는 치욕도 묵묵히 견디었다.
실낱같던 희망조차 무심한 파도소리에 사위어 가며 광해군은 풍화된 바위가 되었다. 거친 세월의 물살에 기어이 넋을 놓아버린 칠월칠석날 '故國存亡消息斷 煙波江上臥孤舟'(나라의 존망조차 소식이 끊어지니, 안개낀 강 외로운 배 위에 누웠노라)로 끝나는 시를 남기고 눈을 감았다. 죽음보다 더 참혹한 하루하루를 애면글면 붙잡고 있었던 광해군의 여생을 보며, 무릇 삶이란 무엇인가를 되돌아본다.
'죽장에 삿갓 쓰고 방랑 삼천리, 흰구름 뜬 고개 넘어 가는 객이 누구냐...'. 대중가요 '방랑시인 감삿갓'의 주인공인 김병연의 운명적인 불효에서 비롯된 기약없는 표류는 또 무엇을 시사하는가. 갓 스물에 나선 행운유수의 삶이 36년째 되던 어느날 김삿갓은 전라도 적벽강 일엽편주 위에서 생을 마감했다. 통한의 삶, 형벌같던 일생의 끝자락에 그도 시 한 수를 남겼다.
歸兮亦難佇亦難 幾日彷徨中路傍(돌아가기도 머물기도 어렵구나, 길가에서 떠돌기가 얼마였던가). 난고평생시(蘭皐平生詩)의 마지막 구절이다. 27세에 요절한 조선의 천재 여류시인 허난설헌의 삶도 가슴을 저민다. 장원급제한 남동생 허균보다 재예(才藝)가 뛰어났다는 그녀는 친정이 당쟁에 휩쓸려 멸문지화를 당했고, 남편의 무심과 시어머니의 질시 속에 애지중지하던 남매를 앞세워야 했다.
이토록 참담하고 처연한 삶은 또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전생의 업보라는 설법으로 위로가 될까. 언제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게 인생임을 모를리 없지만, 오늘도 가진 사람들의 욕심은 끝이 없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회한은 밑이 없다. '부처님 오신날'은 해마다 돌아오지만, 세상은 여전히 이전투구이고 아비규환이다. 무상(無常)의 법문도 소용없는 고해(苦海)의 바다는 그저 인간의 숙명인가.
조향래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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